박상영대구가톨릭대 교수 국문학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국문학

기해(己亥)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특히나 간지에 따라 60년 만에 온다는 ‘황금돼지해’이다. ‘황금’이라 한 데는 10개의 천간 중 ‘기(己)’가 노란색을 나타내므로 부(富)의 상징인 황금과 동일시한 데서 기인한다. 그러고 보면 ‘황금돼지’라는 말 속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부(富)를 축적하고픈 인간의 오랜 욕망이 숨어 있는 셈이다. 심지어‘정’이 적색이니 ‘붉은 돼지해’라야 했던 지난 정해년 때조차도‘붉은색=부의 상징’이라는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황금돼지해’로 불렸던 것을 보면 부(富)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돼지’는 어떠할까? 우리는 보통 돼지꿈을 꾸고 나면 용꿈만큼이나 기분이 좋고 재물이 생긴다고 믿어 복권을 사기도 하고 부자가 될 자식을 낳게 되거나 좋은 음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이처럼 횡재, 복권당첨, 명예 등을 가져온다고 믿을만큼, 돼지는 재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돼지가 오랫동안 가계의 기본적인 재원(財源)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자 ‘돈(豚)’과 ‘돈(金)’의 음이 같은 데서 연유한 것이다.

재물을 상징하는 ‘황금’과 돈(金)을 떠올리게 하는 ‘돼지(豚)’가 만난 황금돼지해가 바로 올해이니 여느 때보다 재복(財福)을 더 크게 기원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는 않다. 그런데 우리의 문헌 속에 등장하는 돼지는 비단 재물만 상징했던 것은 아니다. 돼지같이 먹는다든가 돼지 멱따는 소리,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돼지우리 같다 등의 말들에서 보듯이 돼지는 탐욕스러움, 게으름, 지저분함 등 인간의 천박성을 드러낼 때 사용되기도한가 하면, ‘업돼지’, ‘地神’, 예언 및 점지, 희생 제의물 등 신성한 존재로서 자리매김해 오기도 한 때문이다.

제물로 바치고자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자 한 관리가 국내성 위례암에서 겨우 잡았는데 이곳의 산세와 지세가 뛰어나 왕에게 알려 수도를 옮겼다는 기록(삼국사기 유리왕 조), 12월 납향의 제물로 멧돼지를 바쳤다는 기록(동국세시기), 궁중의 환관들이 횃불을 땅 위에 이리저리 내저으며 “돼지주둥이 지진다”라고 하며 돌아다닌 기록(동국세시기), 기이한 돼지(머리 하나, 몸뚱이 둘, 발이 여덟 개)가 천하를 통일할 징조로 해석되었고 실제 그렇게 되었다는 기록(태종 무열왕 즉위 원년) 등에서 돼지가 갖는 신성한 동물로서의 상징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옛 문헌 속 돼지가 갖는 신성성은 지신(地神) 혹은 재신(財神)으로서의 존재론적 면모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제물 및 예언자로서의 역할이 있었기에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는 점이다. 사실 옛날에는 부자가 가난한 이들에게 적선의 차원에서 돼지새끼 한 마리씩 나눠 주기도 했고, 12월 납향(臘享) 이후에는, 일 년간 고생한 사람들과 함께 돼지고기를 나누어 먹기도 했다. 고기가 매우 귀하던 시절 가난으로 허덕이던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던 그 중심에 바로 ‘돼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처럼 ‘돼지’가 갖는 신성한 존재로서의 상징성은 망각한 채, ‘돈(豚)’보다는 ‘돈(金)’에 최대의 관심사가 놓여 있는 것같다. 주위를 둘러보니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일이 다반사다. 보험금 때문에 수십년을 같이 산 반려자를 죽이는 못난 인사들이 있질 않나, 재산을 빨리 안 물려준다고 고이 키워준 부모에게 고래고래 소리치는 자식들이 있질 않나, 직위와 직권을 이용해 부정한 방법으로 돈 몇 푼 벌려다가 해임되는 교수가 있질 않나. 참으로 돈(金)이 탐욕스런 돈(豚)을 만들어가는 세상이다.

바야흐로 2019년 올 한 해는 정말 황금에 눈이 멀어 탐욕에 가득 찬 돈(豚)들이 아니라 늘 자신을 희생하면서 신성한 존재로서 자리매김해 온 옛 문헌 속 돼지들처럼 소외되고 따뜻한 이웃들을 먼저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의 돈(豚)들이 가득한 한 해이기를 부디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