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욱시인
▲ 김현욱 시인

‘낙원’은 어떤 모습일까? 라틴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낙원을 도서관의 형태로 꿈꿨다. 그에게 책은 진리였다. 그렇다고 보르헤스의 서재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까지 지냈지만, 그의 서재는 소박했다. 보르헤스는 1937년 도서관에 처음 취직한 이래 평생을 사서로 살았다. 선천적으로 시력이 나쁜 탓도 있었지만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끝내 눈이 멀어 버렸다. 그때 나이가 50대 중반이었다.

알베르토 망구엘이 보르헤스를 만난 건 1964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였다. 피그말리온의 단골이었던 보르헤스는 어느 저물녘, 서점 점원으로 일하던 열여섯 살의 망구엘에게 말했다. “저녁에 와서 책을 좀 읽어주지 않겠니?” 그때 망구엘은 몰랐을 것이다. 그 말 속에 숨은 크나큰 운명을. 이후 망구엘은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며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는 셜록 홈스와 바이킹의 전사들 같은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영화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앞이 보이지 않던 그가 촉감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골라내는 뜻밖의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보르헤스와 망구엘의 시간은 그렇게 4년간 계속됐다.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그는 더욱 책 읽기에 빠져들었고 정신적으로 성장했으며 영혼의 눈을 뜨게 되었다. 망구엘은 자신의 책에서 “보르헤스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며,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으며 내 영혼은 자랐다”고 말했다.

보르헤스는 1961년 국제 출판인 협회가 수여하는 포멘터 상을 ‘고도를 기다리며’의 사무엘 베케트와 공동 수상했다. 또한 ‘백 년 동안의 고독’으로 유명한 소설가 가브리엘 마르케스와 ‘스무 편의 사랑시와 한 편의 절망노래’로 일약 세계적인 시인이 된 파블로 네루다와 함께 라틴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보르헤스의 진가는 그의 소설과 시를 통해 라틴문학을 세계 문학의 주류로 이끈 데 있다. 그가 창조해낸 ‘환상’과 ‘악몽’의 세계는 프란츠 카프카에 버금간다는 평을 받으며 오늘날의 문학비평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망구엘이 회상하는 보르헤스와의 시간은 유별난 것이 아니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외롭고 꿈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것같아 낙담하는 수수한 노인의 일상이었다.

보르헤스의 아파트를 찾아가 책을 읽어주고 책과 문학, 삶, 사람, 영화, 예술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망구엘. 보르헤스에게 마지막으로 책을 읽어준 건 1968년이었다. 그해는 망구엘이 스무 살이 되던 해였다. 보르헤스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4년 동안 열심히 책을 읽어준 시간 덕분이었을까? 성인이 된 망구엘은 ‘독서의 역사’,‘보르헤스에게 가는 길’,‘밤의 도서관’등을 출간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떨친다. 물론 그에게 보르헤스와의 시간은 인생의 전환점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보르헤스같은 대문호를 만났기 때문에 망구엘이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보르헤스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 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삶을 함께 공유하면서 인생의 꿈과 진실을 깨우치지 않을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어느새 손끝 시린 겨울 초입이다. 가을이 책 읽기 좋은 계절이라면 겨울은 책 읽어주기 좋은 계절이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홀로 사는 노인이나 생활보호대상자, 소년소녀가장, 장애우들에게 책 읽어 주는 청소년들의 봉사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면 좋겠다. 더불어 가정에서 교실에서 도서관에서 병실에서 책 읽는 소리가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우리의 행복한 시간은 당신과 나 그리고 책 한 권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