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논설위원
▲ 안재휘논설위원

역사 속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은 무인 관료들에게 내리는 처벌의 하나였다. 본인이 자발적으로 내리는 결정이 결코 아니었다. 계급이나 직책없이(白衣) 군문에 종사한다(從軍)는 뜻인 백의종군은 5단계 처벌 중 감옥에 가두는 도형과 곤장을 때리는 장형 사이 경징계의 벌(罰)이었다. 정확하게는 무과 과거 급제자의 신분은 유지해주면서 계급과 직책을 박탈하는 형벌이었다.

‘백의종군’ 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두 번이나 당한 충무공 이순신을 떠올린다. 첫 번째는 1587년 조산보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 직책을 맡던 중 북방 오랑캐를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누명을 쓰고 받은 백의종군 처분이었다. 두 번째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과의 갈등에다가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왜국의 작전에 휘말린 선조가 수군통제사 자리를 뺏고 백의종군을 명한 처벌이었다. 두 번 모두 억울한 조치였다. 최근 정치권에서 일어난 이른바 ‘셀프 백의종군’은 야릇하다. ‘친형 강제입원’ 의혹과 관련해 직권남용과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된 이재명 경기지사는 지난 12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당의 단합을 위해 필요할 때까지 모든 당직을 내려놓고 평당원으로 돌아가 당원의 의무에만 충실하겠다”면서 백의종군 의사를 밝혔다. 하루 뒤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김경수 경남지사도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즉각 이재명 지사에 대한 징계를 유보했다. 이해찬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재명 지사에 대해 “별도 징계는 하지 않기로 했다”며 “재판 결과를 지켜보겠다”고 밝혔다. 굳이 야당들의 비판과 반발이 아니더라도 ‘셀프 백의종군’은 수상하다. 정황상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느껴진다.

민주당이 ‘징계유보’ 결정을 내리는 과정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다. 민주당은 당초 검찰의 기소가 결정되면 징계를 할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막상 기소 결정이 나자 당사자는 생뚱맞은 ‘셀프 백의종군’을 밝히고, 당은 고민하는 시늉조차도 안 하고 ‘징계유보’ 결정을 내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유권무죄(有權無罪)라는 말이다. 큰 물고기는 다 빠져나가고, 잔챙이만 걸려드는 마법의 그물도 생각난다. 그 앞뒤 안 맞는 이상한 그물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예나 지금이나 살아남는 일마저 버거운 민초들의 삶이 애처롭다. 언제까지 힘센 자와 돈 있는 자들에게만 유리한 요상한 법치(法治)의 이율배반을 견뎌야 할까. 역사에 비춰 보아도, 상식에 견줘 보아도 현직 벼슬을 유지하는 백의종군이라니 어림없다. 집권당의 입장에서 차기 대선주자 군(群)에 속한 이재명·김경수 두 도백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부실로 인한 민심이반이 점차 심각해지는 시점에 내부갈등마저 폭발한다면 긴박한 상황을 맞을 수도 있으리라는 위기의식의 발로일 것으로 짐작되기는 한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렇게 간단할까.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의 청색 완장을 동원해 끈질기게 ‘정치보복’을 일삼는 일도 그렇거니와, 자신들의 허물에는 말도 안 되는 ‘셀프 백의종군’ 쇼와 ‘징계유보’ 결정을 핑퐁하는 행태가 민심에 미칠 악영향은 뜻밖으로 깊고 넓을 수 있다. 여차하면 관습적 ‘오만방자(傲慢放恣)’ 구태에 갇히는 수도 있다.

정의가 샘물처럼 살아있는 세상을 일궈내는 일이 이렇게도 어려운가.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시시비비의 천칭으로 지도층의 양심을 정죄해나가는 신실한 정부는 결국 불가능한 것일까. ‘권력’의 자장에 의해 좌우되는 이상한 ‘정의’ 에 장삼이사 평범한 백성들은 답답하기만 하다. 이재명·김경수 두 정치인의 기소와 백의종군은 과연 이순신 장군처럼 역사에 억울한 일로 기록될 수 있을까. 흉중을 파고드는 찝찝한 기운이 만만찮은 엄동 한복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