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원(屈原· B.C. 339~278)은 먼 옛날 중국 초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몰락한 귀족의 자손으로 그러나 어려서부터 훌륭한 품격에 고매한 정치적 이상을 가졌다.

그가 살던 시대는 전국 시대 말기로 굴원의 초나라는 제나라와 진나라 사이에서 국운을 걱정해야 하는 곤궁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굴원은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자고 하였다. 지금 같으면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디 붙느냐 하는 격일까? 어느 시대나 간신들, 모리배들이 있는 법,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왕의 버림을 받아 오랜 세월을 남쪽 세상을 떠돌게 된다. 중국 땅은 드넓으니 십 년 헤매일 곳도 있으련만 우리 같으면 산수갑산에 처박히거나 보길도 같은 데 숨거나 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 없으리라.

오랜 방랑으로 몸이 상할 대로 상한 굴원이 한 어부를 만난 이야기를 노래한 것이 바로 ‘어부사(漁父辭)’다. 후대 사람이 굴원인 양 지었다는 설도 있다. 여기서 그는 자기를 알아보는 어부를 향해 온 세상 사람이 모두 탁한데 자기 자신만은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취해 있건만 자신만 홀로 깨어 있다고 한탄한다. 꼭 우리네 사람 사는 이야기 같아 낯이 뜨거운 대목이다. 굴원과의 문답 끝에 그 어부가 한 노래를 불러 그를 일깨운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그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

이 창랑은 한자 뜻대로면 푸른 바닷물이라 하겠지만 필시 굴원이 방랑하던 남쪽 어느 곳의 물 이름일 것이다. 지금으로 보면 바로 우리 세상을 가리키는 말도 될 것이다. 요즘처럼 탁한 세상도 발을 씻기에는 부족치 않단 말인가? 아, 요즘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 탁한 건지 맑은 건지도 분간이 어렵다.

기왕 굴원의 ‘어부사’에 눈길이 갔으니 충정의 노래로 널리 알려진 ‘이소(離騷)’를 찾아본다. 옛날 고등학교 한문 시간에 ‘離騷’를 어느 부분 배운 기억도 있는데, 그 후로는 까마득히 잊었던 작품이다. 서포가 정철의 양미인곡과 ‘관동별곡’을 두고 “동방의 이소”라 했다지만 사실 굴원은 그 넓이와 깊이, 높이 면에서 조선의 ‘굴원’을 넘어선다고 해야 한다. 이 비유조차 헛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소’에 관한 이야기를 보니, 근심과 이별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이 제목이 오히려 근심을 만난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한다. 굴원의 생애를 살피면 그는 정말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끝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게 되고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자 그는 멱라수(汨羅水)라는 물에 몸을 던져 고단한 생애를 끝마치고 말았다.

얼마 전에 이백(李白·701~762)의 시들을 어떻게 읽어 본 적이 있다.

그 또한 굴원처럼 위대한 시인일 뿐 아니라 나라와 세상을 걱정하는 사람이었으니, 시인과 정치는 그렇게 멀면서도 가깝기도 한다. 시인의 신화가 완성되려면 정치에선 비극이 따라야 하는가.

나라며 역사며 현실이 다 덧없건만 그 옛날에도 지금도 속세를 떠나려 함에 시인이면서도 그 세상에 발목을 붙잡히곤 한다. 나는 절대로 ‘중취독성(衆醉獨醒)’을 노래하지는 않을 것이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