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신라의 여인들 학술발표회’

▲ 주낙영 경주시장이 21일 국립경주박물관 강당에서 열린 ‘경주의 재발견-신라의 여인들 학술발표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 주낙영 경주시장이 21일 국립경주박물관 강당에서 열린 ‘경주의 재발견-신라의 여인들 학술발표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서라벌 여성들의 삶을 통해 보편적 신라인의 역사적 행적을 되짚어 보는 ‘경주의 재발견-신라의 여인들 학술발표회’가 21일 오후 2시 국립경주박물관 강당에서 개최됐다.

이형우 교수는 ‘은유로 읽는 삼국사기의 신라 여성’, 조범환 교수는 ‘신목태후에 대한 새로운 이해’란 주제로 신라 여성의 생애를 추적했다. 또 세명대 이창식 교수를 좌장으로 송희복 진주교대 교수와 서영교 중원대 교수, 윤진석 계명대 교수, 강석근 동국대 교수가 열띤 토론을 펼쳤다.

이형우 한양대 교수- ‘은유로 읽는 삼국사기의 신라 여성’

“신라 여성 은유는 지위 역할이
남자 못지않게 중요했고
나라를 위해 헌신·희생해야 했고
효와 예를 남성과 똑같이 행해야 했으며
부역에도 동원됐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신라 여인들은 왕비 계열이 대부분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왕비 관련 기사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이를 제외하면 일반 여인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다양한 해석소가 빈약하기에 ‘삼국사기’만의 신라 여성상을 추출하기가 어렵다.

당연히 ‘신라’라는 수식어를 붙이기가 난감하다. 그래서 그런 관심은 ‘삼국유사’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또, ‘삼국사기’ 속의 신라 여인상 연구는 대부분 역사학 전공자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자료의 많고 적음이 ‘신라’를 규명하는 결정적인 사유는 아니다.

사서(史書)의 기술(記述)은 사실(史實)이나 그에 가까운 일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편찬자의 안목이 개입해 있다. 당대의 시비이해와 관련된 것은 싣고 재구성하고 재창작 한다. 보여주기는 감춤이고, 강조는 약화다.

이런 양상이 단어에서 문장으로, 문장에서 텍스트로 확장되고 있다. 우리는 나름대로의 틀(개념/가치관)을 지니고서, 그것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소통한다. 그 틀이 개념이고 차원이다. 그런 체계가 은유를 만든다.

신라 여성 은유는 ①지위 역할이 남자 못지않게 중요했고, ②나라를 위해 헌신, 희생해야 했고, ③효와 예를 남성과 똑 같이 행해야 했고, ④부역에도 동원 됐고, ⑤혼인시 본인의 뜻도 반영됐고, ⑥산악신 주인공이 여성이듯이, 당시 여성에 대한 관점과 역할 등이 대단했던 실상과 그 밖의 일들에서 나온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가장 행복한 여인을 고르라면 석품의 아내와 흥덕왕비가 아닐까 싶다. 석품은 진평왕 때 사람이다. 역모가 발각되어 백제의 국경까지 도망갔다. 공모자인 칠숙의 구족까지 멸했다는 기록으로 봐서 범죄의 막중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처자가 그리워 돌아왔다.

총산(叢山)에서 나뭇꾼 옷으로 바꿔 입고 집 앞에서 얼씬거리다 잡혀 죽었다. 흥덕왕은 왕비(장화부인)가 죽자 시녀조차도 가까이 않았다. 죽어서도 같이 묻히길 소망했다. 그리움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가장 위대하게, 가장 감동적으로 만든다. ‘삼국사기’는 신라를 그런 아내, 그런 남편이 있는 나라로 묘사해 놓고 있다.

은유는 선택과 배제라는 점에서 목표지향성이 분명하다. ‘삼국사기’도 같은 맥락에서 썼다. 명확한 목표(혹은 목적·요구사항· 이정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산물이다.

‘삼국사기’ 속의 여인은 나라마다 이미지가 다르다. 그것이 나름대로 그 사회의 홀로그램이 된다. 은유를 통해 나타나는 신라 여인들은 신라의 바탕(국본)이었고 기둥이었다. 신라를 유지하는 질서였고, 나침반이었고, 균형추였다.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었고 값진 희생이었다. 그들은 유교 이념으로 단순화 한 충효열(忠孝烈)의 모형이 아니었다. 고려 문벌들의 입지 강화를 위한 도구도 아니었다. 신라 여인들의 속성은 어떤 이념보다 우선하는 인간다움에 있었다. 이들은 신라 그 자체였다.

조범환 서강대 교수- ‘신목태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신목태후는 유복녀로 태어났으나
신문왕의 왕비가 되어
이전에 낳은 아들을 태자로 삼아
효소왕으로 등극시켰으며
16~20세 무렵까지 섭정하였다”

신목태후는 신문왕의 두 번째 부인이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을 계기로 하여 첫 번째 부인을 출궁시키고 신목태후를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였다.

신목태후는 사리함 명문에서 볼 수 있듯이 효소왕 9년(700) 6월 1일에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렇게 보면 효소왕이 재위한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왕모로 있었으며 아무래도 정치적 위상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기왕의 연구를 살펴보면, 신목태후에 주목하여 연구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신문왕대나 효소왕대의 정치적 동향 및 성덕왕의 왕위계승 등을 살피는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신라 화랑 전체를 통괄하는 우두머리인 화주(花主)로 신목태후를 지목한 연구도 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연구는 신목태후를 당시의 정치를 주도한 세력의 한 부분으로 보거나 혹은 특정한 집단의 최상에 위치한 그러한 인물로 파악하고 있어 그녀의 일생을 제대로 파악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에 신목태후에 대해 이루어진 기왕의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그녀의 일생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검토해 볼 필요성이 있다.

그녀는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 죽는 바람에 유복녀로 태어났다. 그리고 왕비가 되기 이전까지 행적이 자세하지 않지만 외사촌인 정명과 눈이 맞아 자식을 낳았다. 그러나 그녀는 태자비가 되지 못하고 지내다가 김흠돌의 난으로 왕비가 출궁되자 그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보면 그녀는 왕비가 되기 이전까지는 힘든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힘든 생활을 하였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고통이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신문왕의 비가 된 이후에는 그러한 고통이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왕비가 된 이후 다시 아들을 얻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정명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홍을 태자로 삼았으며 나중에 그가 효소왕으로 즉위하였다. 효소왕이 즉위하였을 때의 나이가 16세 정도였으므로 신목태후가 정국을 주도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섭정은 신목태후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효소왕이 20세 무렵에 친정을 하게 되자 신목태후는 정권의 핵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러한 가운데 신목태후와 함께 정국을 주도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경영도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경영이 난을 일으켜 혼란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신목태후도 헤어나지 못할 병을 얻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700년 6월 1일에 죽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날에 대하여 “세성이 달을 침범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종합토론>

“이번 학술회에서 우리가 알던
김부식의 주된 사상이라 평가된
남성중심적 사관, 유교 중심적 사관이 아닌
새로운 관점이 드러난 것 같다”

△이창식(좌장·세명대학교 교수)

백제, 고구려보다 한발 앞서서 비록 우리나라 전체로 봤을 때 변방인 동해 쪽에서 통일 천 년을 완성한 신라의 뒷받침에는 ‘여성의 힘’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연구는 학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소통의 가치가 있다. 오늘날 유물이나 설화, 기록 등에서 신라 여성들의 기도나 정성 등을 살필 수 있으며 이런 배경에서 신라의 화랑들이 국가와 가족을 위해 용감한 죽음을 맞았다. 신라의 여인들은 이런 정신적 가치를 끊임없이 시사해주고 있으며 그런 점은 앞으로 이런 학술회의를 통해 더욱 발굴해 내야 한다.

△이형우(한양대학교 교수)

역모가 발각돼 백제 국경까지 도망간 석품의 아내, 공모자인 칠숙의 구족까지 멸했다는 기록으로 보건대 이는 막중한 범죄였으나 석품은 처가 보고 싶어 돌아갔다. 흥덕왕의 왕비인 장화부인이 죽자 왕이 수절한 사례 등을 보건대 어떤 여인이기에 이렇게 사랑을 받은 인물일까, 남녀 간 목숨을 건 사랑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로 그들이 행복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오늘날 이런 덕목들이 사라지고 있어 아쉬움을 남기는 가운데 이러한 기록들은 더욱 감동을 부각시킨다. 삼국사기에 실수투성이 기록이 많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자극받고 오늘을 꿈꾸고 내일을 슬기롭게 보낼 수 있다는 것. 이 기회를 통해 삼국사기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조범환(서강대학교 교수)

김흠돌의 난 당시 같이 죽은 사람이 김군관이다. 그는 역모를 알고 있음에도 알리지 않았기에 같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기록에는 많이 나와있지는 않지만 여러 사람들이 틀림없이 제거를 당했을 것이다. 사료에 나와있지 않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으로 사료를 우리가 폭넓게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효소왕대 죽지랑과 관련된 기록은 효소왕 때 얘기도 들어 있지만 진평왕의 이야기도 있다. 두 사료가 섞이는 바람에 언뜻 읽으면 논리적인 모순이 생기지만 잘 나눠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연구, 여러 논문들이 있어 참고해야 한다.

△송희복(진주교육대학교 교수)

신라의 여인은 본능의 실현이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여인들은 현모양처와 부덕의 미덕이라는 고정적인 틀 속에 갇혀 있었다. 이에 비해 신라의 여인네는 개방적이고 자기 결정적이면서 자유분방했다. 이 자리에서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양성평등 사회의 지향과 관련된 저간의 시사점이다. 남성 편력과 권력욕을 향유한 미실이나 신목태후 또한 진성여왕의 사례를 두고 보면 고대 사회가 현대 사회보다 오히려 양성평등의 저울추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서영교(중원대학교 교수)

역사의 진실은 비루한 것이다. 흥덕왕은 자신의 형인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과 결혼했다. 흥덕왕은 소성왕의 아들 애장왕을 죽이는데 가담했다. 자신의 남동생을 죽인 남편을 장화부인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하지만 장화부인은 피로 더럽혀진 왕좌에 살인자 남편과 앉았어야 하지만, 한 많은 세상을 떴다. 나이 50줄에 선 흥덕왕은 세상을 살면서도 죽어서 부인과 영원히 함께하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임종을 헤매는 상황에서도 장화부인과 묻어달라고 말을 되풀이했다. 그것은 왕으로서가 아니라 죽음에 직면에서 한 인간으로 돌아간 그의 과거에 대한 회안이었다.

△윤진석(계명대학교 교수)

김춘추와 문희가 혼인을 이루는 과정에 대한 ‘삼국사기’의 서술내용은 ‘당대가 그런데 신라 여인들을 유교라는 잣대로 묶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신라여인은 자연 그 자체였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여성’을 삼국사기 찬자는 유교적 분식으로 정숙한 여인으로 묘사한 것이다. 발표의 주장과 달리 김춘추와 문희의 혼인 사례에 의하면 ‘신라 여인은 자유분방한 자연 그 자체였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신라 여인의 사적을 유교적 시각으로 분식해 서술했다’고 고쳐 써야 할 것이라고 의견을 제시한다.

△강석근(동국대학교 교수)

삼국사기에 실린 신라여성 전반을 은유의 관점에서 살펴 흥미로웠다. 신라의 여인을 살펴보기 위해 고구려, 백제, 고려인의 눈으로 신라를 살펴 은유적인 관점이 더욱 가치 있다고 생각된다. 이번 학술회에서 우리가 알던 김부식의 주된 사상이라 평가된 남성중심적 사관, 유교 중심적 사관이 아닌 새로운 관점이 드러난 것 같다.

/홍성식·고세리기자
 

    홍성식·고세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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