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창구<BR>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우리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민주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민주주의 교육을 받아 왔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원칙’의 전제가 되고 있는 ‘대화와 타협’은 민주시민이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이라고 배웠다. 다수결원칙은 단순히 다수 의사에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견(異見)과 갈등을 민주주의 공동체의 가치로 조정, 통합해 나가는데 그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의 다양한 가치관을 존중하며 이해관계의 차이를 인정한다. 따라서 대화를 통해 인식의 차이를 좁히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설득과 타협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필수과정이다. 반면에 독제체제에서는 오직 하나의 가치관을 절대화하기 때문에 대화와 타협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민주주의는 ‘상대성’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이지만, 독제체제에서는 신격화된 인간의 ‘절대성’, 즉 절대권력자에 대한 복종만 강요될 뿐이다. 그런데 민주시민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성장하면서 점차 혼란에 빠진다. 학교에서 배운 민주정치는 대화와 타협인데, 정치현실에서 정치인들은 ‘내로남불’의 ‘흑백논리’로 날을 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이미 한국 정치문화의 폐단이 되어버린 ‘승자독식(勝者獨食)’과 ‘승자의 일방통행’은 공동체의 대의를 위한 대화와 타협을 불가능하게 하고 패자(敗者)의 저항만을 부추기고 있을 뿐이다.

한국정치의 비민주성은 정치인들이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강변하는 오류에서 비롯되고 있다. 보수 또는 진보라는 ‘프레임(frame)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주장이 나의 견해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라고 비판한다. 진보주의자는 보수주의자를 통일반대 세력으로 매도하고, 보수주의자는 진보주의자들을 친북 세력이라고 비난하면서 서로 상대방의 주장에는 귀를 막는다. 노란색 안경을 낀 사람이 초록색 안경을 낀 사람에게 세상은 노란색인데 당신은 초록색이라고 하니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안경을 서로 바꾸어서 사용해 보는 것, 즉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이다.

흑백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극단적 대결의 한국 정치풍토에서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는 통합론자는 자칫 회색분자 내지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 이러한 풍토는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과연 당신은 천사이고 나는 악마인가? 파스칼(Pascal)이 갈파하였듯이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야수도 아닌 중간적 존재’임을 명심할 일이다. 우리가 중간적 존재로서 보수와 진보의 장점을 수렴하고 그 단점들을 배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한국정치는 선진화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국가안보를 염려하는 보수’와 ‘남북대화를 강조하는 진보’가 허심탄회하게 대화와 협력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확고한 안보의 바탕 위에서 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정치에서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도 정치권력을 가진 자의 솔선수범이 필요하다. 이는 보다 ‘큰 권력을 가진 정부여당’이 상대적으로 ‘작은 권력을 가진 야당’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인이나 교수 등 지식인들은 한국정치의 선진화를 위하여 대화와 타협의 정치문화 조성에 앞장서야 한다. 다만 이 경우에도 보수나 진보에 편향된 보도 자세를 취하는 ‘외눈박이 언론’이나 특정 정당에 밀착된 권력지향성이 강한 ‘폴리페서(polifessor)’들은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오직 특정 이념이나 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언제나 자유롭게 ‘경계선(境界線)에 설 수 있는 균형감을 잃지 않는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