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논설위원
▲ 안재휘논설위원

1973년에 나온 미국의 역사학자 슐레징거 2세(Arthur Meier Schlesinger, Jr.)의 ‘제왕적 대통령제(The Imperial Presidency)’라는 책은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시끄럽던 닉슨 행정부의 막강한 권위를 묘사한 제목이다. ‘제왕적’이라는 말은 명목상 ‘3권 분립’을 선택하고 있으면서도 행정부의 권한이 과대한 경우 극단적으로 대통령 독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로 회자된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도 수없이 언급돼 왔다. 대통령이 나라의 온갖 크고 작은 일들을 다 들여다보고 좌지우지하려고 한다고 해서 ‘만기친람(萬機親覽)’이라는 비판용어까지 등장했다.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비난은 보수정권시절 진보 야권(野圈)에서는 약방의 감초였다. 아마도 진보인사들 중에 이 말을 입줄에 올리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제왕적’이라는 수식어는 아마도 박근혜정부 시절에 가장 많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소위 ‘진박(眞朴)’을 앞세워 집권당의 공천마저 마음대로 주물러 터지게 만들던 시절에는 당시 여권(與圈)에서마저 불거진 비판용어이기도 하다. 각기 이유는 다를지언정 ‘분권형 대통령제’를 담은 ‘개헌’은 굳어진 국민들의 여망이다. 한 사람에게 ‘제왕적’ 권력이 쏠리는 일을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참지 않게 된 것이다.

문재인정권은 ‘촛불정신’을 숭앙한다. 그러나 각자의 관점에 따라서 필요한 논리를 갖다 붙이는 방식으로 ‘촛불정신’이라는 개념을 남용하는 일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대통령이 제왕적 권한을 가지고 무소불위의 힘을 과용하는 것은 ‘촛불정신’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최소한 박 대통령 탄핵 이전과 이후는 우리가 분명히 달라야 한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의장단과 여야 정당 대표들을 대동하고 싶어했다. 통일문제가, 북한 비핵화 문제가 민족의 염원인 만큼 그 발상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안’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결정은 자기들끼리 다 해놓고, 행사장에 와서 박수나 치라고 욱대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판문점선언’ 국회 비준 논리도 여러 측면에서 억지스럽다. 김정은의 비위를 맞추어주어 용단을 끌어내는 일은 전략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전략에 정치권 모두가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지난 4월 판문점 정상회담 내용에 대해 정치권은 인식도 내용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청와대는 그 공(功)을 눈곱만큼도 나눠줄 의사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비핵화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점이다. 며칠 전 미국NBC뉴스는 미국 전·현직 고위관리 3명을 인용해 “북한이 올해에만, 최대 8기의 핵무기를 제작했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도대체 뭣 때문에 ‘판문점선언’ 비준과 평양 정상회담 동행을 주장하는가. 공(功)은 자기들이 다 갖고, 들러리로 나서서 박수만 쳐달라는 고약한 심사의 기반은 또 무엇인가.

다른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문재인정권도 드디어 ‘오만방자’의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듯하다. 실업자가 넘쳐나는 시대에 ‘전 정권’탓만 하면서 미심쩍은 경제정책을 막 밀어붙이는 것부터가 그렇다. 대통령비서실장은 평양정상회담 동행을 거절한 국회의장단과 야당 지도부를 향해 ‘꽃할배’라고 조롱했다. 이낙연 총리는 한국은행의 고유권한인 ‘금리인상’ 문제를 잘못 건드려 금융시장이 화들짝 움찔거리자 전전긍긍하고 있다.

촛불민심을 자처하는 분들에게 정중히 묻는다. 이제 “제왕은 사라졌느냐”고. 그래서 “우리 국민들이 지금 참 행복하냐”고. 진보 정치인들에게 또 묻는다. 개헌도 안 되고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제왕적 대통령제’ 문제를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왜 이렇게 단 한 분도 없이 사라졌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