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욱시인
▲ 김현욱시인

대단한 여름이었다. 태풍을 이토록 기다려보기도 처음이고,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는 부모님이 에어컨 주위에서 떠날 줄 모르는 것도 처음이다. 끝날 것같지 않았던 폭염과 열대야의 기세도 이제 서서히 꺾이고 있다. 어김없는 계절의 변화가 감지된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녘에 바람을 풀어 놓으십시오 …(중략)…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라는 릴케의 시 ‘가을날’이 떠오른다.

뉴스를 보니 이번 여름에는 해수욕장보다는 계곡으로 사람이 많이 몰렸다고 한다. 살인적인 폭염을 피해서 그늘 많고 물 시원한 계곡으로 발길이 가는 건 인지상정이다. 도시에서는 전기세 폭탄을 피해서 대형마트, 백화점, 도서관, 카페 같은 실내가 붐볐다는데 단연, 으뜸인 곳은 도서관이다. 돈 한 푼 안 들이고도 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딸아이와 방학동안 꾸준히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에서 책도 읽고 여름방학 과제도 하고 심지어 로비 소파에서 낮잠도 잤다. 분식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나도 이다음에 도서관 근처에 예쁜 밥집을 차리고 싶다는 없던 꿈까지 꾸게 되었다. 아무렴,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여름휴가 중에 한강의 ‘소년이 온다’, 김성동의 ‘국수’, 진천규의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를 읽었다는데 어떤 책이 가장 기억에 남는지 궁금하다. 국민청원에 대통령의 독후감을 공개해달라는 청원을 올리면 국민이 동의해줄까? 개인적으로 이번 여름에 읽은 책 중에는 김태완 선생의 ‘대혜서장(大慧書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다가 아예 사버렸다. 밑줄 치고 귀퉁이를 접고 손댈 때가 많은 책이다. 송나라 대혜종고(大慧宗<6772>)의 편지글을 모아 엮은 책인데 우리나라 불교전문강원에서 교과서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대혜서장’은 간화선의 창시자인 대혜종고 스님이 사대부들과 참선에 관해 주고받은 65통의 편지글을 모은 책이다. 간화선의 본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참선(參禪)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며, 불법을 보는 안목, 방편의 언어와 진실에 관한 안목 역시 보여 준다. 아울러 빠지기 쉬운 잘못된 선병(禪病)들과 그릇된 공부 자세를 지적하여 알려 줌으로써 도중에 길을 벗어나 헛되이 세월을 낭비하지 않도록 인도하는 책이다.

‘대혜서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조용하고 편안한 곳에서 묵묵히 앉아 좌선에만 몰두하는 묵조선을 매섭게 질타하는 부분이다.

“고요하고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것은 결국 시끄럽고 번잡한 환경에서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함입니다. 시끄럽고 혼잡한 일상 속에서도 화두 공부가 된다면 그 힘은 고요하고 좋은 환경에서 공부한 것보다 천만 배나 뛰어납니다.”

대혜 선사가 사대부들의 참선 지도에 구업을 마다하지 않고 공을 들인 이유는 일상에서 깨달음을 얻어 공부인들이 가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고, 서는 곳마다 주체가 되라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의 뜻이 아니었을까.

대통령이 책의 어떤 구절에 밑줄을 긋고 옮겨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지난 여름에 가장 정성껏 필사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다만 하루 종일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가운데 때때로 자신에게 일깨워 주시고 때때로 자신에게 말해 주셔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를 일상의 삶에서 떼어 놓지 마십시오. 한번 이와 같이 공부를 해 보십시오. 한 달이나 열흘쯤 지나면 문득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천 리에 걸친 일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