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정치권에서 국가주의와 공화주의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국가주의(Statism)는 정치학에서 국가를 가장 우월적인 조직체로 인정하고 국가 권력이 경제나 사회 정책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조를 의미한다. 반면에 공화주의는 개인의 사적 권리보다는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덕을 강조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다.

사실 우리나라는 과거 국가주의적 정책을 통해 고도성장을 이뤄냈다.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민간부문을 진두지휘해 한국 경제의 근대화·현대화를 이끌었다. 경공업부터 중화학 공업과 첨단 IT산업까지 정부가 주도적으로 주력 산업을 키워냈다. 일상생활에서 머리와 치마 길이를 단속하는 등 국민의 삶 구석구석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한국경제 규모가 커지고, 국민의식도 바뀌면서 민간 자율 영역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이런 추세가 지속됐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IMF(국제통화기금)의 요구에 맞춰 시장경제 원칙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노무현 정부도 중소기업 고유업종 제도를 폐지하고, 한미FTA 협상에 나서는 등 개방과 자율의 큰 틀을 지켰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들어 소득주도성장을 내세우면서 과거의 국가주의로 되돌아가고 있다. 경제성장을 통해 자연스럽게 소득이 늘어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소득을 늘려 성장을 이끌어낸다는 게 이 정부 경제정책의 핵심이론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시장과 가격에 대한 전면적이고 전방위적인 개입에 나섰다. 최저 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비정규직 해소 등 경제와 기업에 충격이 될 수 있는 정책들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자영업자들이 큰 타격을 받자 이들을 보호한다며 임대료 통제와 신용카드 수수료, 프랜차이즈 가맹비 인하를 추진하고 있다. 규제와 통제가 낳은 문제를 더 많은 규제와 통제로 해결하겠다는 발상이다. 소득주도성장론자들은 국가주의의 환상에 빠져있는 게 틀림없다. 고용 참사가 벌어지고, 빈부 격차가 10년만에 최악으로 확대되고, 기업 투자가 얼어붙고, 서울 아파트값이 폭등했는 데도 정부와 청와대는 “우리는 올바른 경제정책 기조로 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에 반해 자유한국당 김무성 의원이 꺼내든 ‘공화주의’는 새로운 담론으로 주목받고 있다. 공화주의는 시민들이 덕을 가지고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 과정에서 공공선에 대한 헌신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김 의원은 “우파 정치는 헌법 정신을 준수하고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민주주의 못지않게 공화주의를 중시해야 한다”며 “견제와 균형을 중시하는 공화주의는 민주주의의 결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정치권이 국가주의와 공화주의로 갈려 사상적 논쟁을 벌이는 걸 보노라니 어느 일간지에 실린 김형석 명예교수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도산 안창호(1878~1938)의 강연을 듣고, 윤동주(1917~1945) 시인과 동문수학하고, 정진석(86) 추기경을 제자로 둔 그는 1920년 평남 대동에서 태어나 스물다섯살에 광복을 맞았지만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경험하다 탈북했고, 서른살에 6·25 전쟁, 40대엔 4·19 혁명을 목격한, 100년의 우리 역사를 증언할 수 있는 철학자다. 김 교수는 인터뷰에서 우리 민족성 가운데 시급히 고쳐야 할 단점으로 절대주의 사고 방식을 뒷받침하는 흑백논리를 꼽았다. 그러면서 그는 특정이념이 아닌‘경험주의’를 강조했다. “학문이나 사상은 합리주의가 앞설 때도 있지만 정치나 경제는 경험주의를 택해야 해요. 현실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를 개선해 나가는 겁니다. 극성스럽게 반미(反美)를 외치던 중국도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상대방과 생각이 같으면 대화보다 행동이 필요하고, 생각이 다를 때는 상대방 얘기를 들어야 합니다.”노교수의 지혜어린 조언이 가슴에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