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곤<BR>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대구에서 ‘근대(近代)‘라는 콘텐츠가 부각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것 같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근대기는 곧 일제강점기이며, 국권피탈로 암울했던 식민통치에 의한 부끄러운 역사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것같다. 그래서인지 식민잔재 청산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는 일단 모든 잔재와 흔적은 없애고 보자는 관료적 행정으로 일관되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처럼 한국근대기와 교차되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변화되고 있다. 식민지 잔재를 무작정 철거하기보다는 역사교훈의 장으로 활용하자는 분위기가 새롭게 조성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대구근대 골목투어를 들 수 있다. 동산청라언덕을 시작으로 선교사주택, 만세운동길, 계산성당, 제일교회, 약령시로 이어지는 근대문화코스와 1930년대 대구의 중심상권으로 급부상했던 북성로에 숨겨진 이야기들은 거리의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진귀한 가치를 품고 있다.

특히 대구근대 문화벨트 내에는 일제강점기 대구를 대표했던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 활동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어 그 가치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진다. 이상화, 현진건, 백기만, 이응창, 이윤수로 이어지는 문학인들과 박태준, 현제명, 권태호, 박태원, 김문보 등 음악인 그리고 김진만, 박기돈, 서동균, 서병오, 김용조, 박명조, 서동진, 서진달, 이인성, 이쾌대 등의 미술인들의 흔적은 대구 근대기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산재되어 있는 근대 예술인들의 작품들과 예술 활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보존할 수 있는 근대미술관 설립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공감대를 얻어가고 있다.

어느 지역보다 서양문물의 유입이 빨랐으며, 능동적인 근대화 수용을 통해 문화선진화를 이끌어갔던 대구에 근대미술관이 건립되어야 한다는 지역 미술인들의 주장은 충분한 명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대구·경북에 처음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미술(美術)’은 당시 일본에서 서양화를 익히고 귀국한 유학생과 대구·경북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교사(화가)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전수되기 시작했다.

1900년대 초반 일본 유학을 통해 미술을 공부하고 귀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인 이상정에 의해 체계적인 미술교육이 이루어진 것은 1917년부터 계성학교와 신명여고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던 시기로, 대구가 한국미술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역사적 배경이 되는 셈이다. 더불어 한국 서화계의 대표인물인 석재 서병오에 의해 결성된 ‘교남시서화연구회’의 활발했던 화단활동은 ‘대구서화전람회’ 개최에 이어 이듬해 열린 ‘대구미술전람회’는 한국미술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건이며 전시였다.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인들의 삶과 예술 활동의 터전이 대구·경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과 한국전쟁의 피해가 전무한 대구에는 한국근대기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져 있다는 점 등이 대구근대미술관 건립의 당위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물론 경상감영 공원 내 대구근대역사관과 달성 공원 내 향토역사관이 운영되고 있어 대구근대기 문화를 수집보존전시로 이어지는 연구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지만 이는 근대기생활사에 국한된 사료발출과 보존기능에만 국한된 활동으로 여겨진다. 일제강점기 지역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대구·경북을 터전으로 작품 활동을 펼쳤던 원로화가분들의 타계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이러한 미술관 설립과 아카이브 구축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여겨진다. 대구의 새로운 문화관광인프라 구축을 위한 대구근대미술관 건립 기초연구와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