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에 만주 4박 5일은 쉽지 않다. 여정표가 나올 때 심사숙고 해볼 것을.

토지학회라고, 박경리 선생 대하소설 ‘토지’의 공간을 찾아 공부하는 사람끼리 30명 단체 여행. 창춘으로 들어가 길림대학에서 공부, 집안의 환도산성, 광개토왕비와 왕릉, 장수왕릉 보고, 인삼 집산지 통화 거쳐 다시 창춘, 하얼빈.

만주는 이번이 네번째? 그동안 창춘, 하얼빈이 고작이요, 그 ‘흔한’ 백두산 한 번 못 가봤고, 아하, 한번은 그래도 단동, 신의주의 압록강 맞은 편에도 갔다. 그때 지방도 어디쯤 식당에서 직접 담근 들쭉술이 아주 맛있었다. 단동의 옛날 이름은 안동, 일제 때 백석이 머무르기도 했던 곳. 중국은 일본이 물러간 후 봉천은 심양으로, 안동은 단동으로, 신경은 창춘으로 바꾸어 놓았다. 당연한 일.

집안에서 옛 고구려 흔적을 둘러보고 애달픈 마음을 안고 창춘에서 고속철 타고 ‘부여’역 지나 하얼빈으로 향했다. 다 고조선, 고구려, 옛 부여의 애환 서린 곳들이다. 하얼빈 첫날은 이효석의 옛 기타이스카야, 중국인 거리와 박경리 선생의 흔적 남은 쑹화강변 돌아보고 지쳐 쓰러졌고.

다음날 아침부터 일행은 안중근 기념관으로 향한다. 서른한 살의 의병 부대장 출신, 옛 한중 국경 근처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절치부심, 열두 사람이 왼쪽 무명지를 잘라내며 일본과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하기 위한 그날이 닥쳤다.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세 청년 중 만약을 위해 두 사람은 채가구로 가고 안중근 혼자 하얼빈 역두에 남았다.

만약 이토 히로부미의 행선이 달라졌다면 안 의사의 생명은 지상에 더 오래 머물렀을 수도 있었겠다. 그렇다고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으리. 목숨을 바쳐 적을 응징하지 않고는 풀릴 수 없는 응어리 안고 어떻게 오래 견딜 수 있었으리. 남의 나라의 국권을 빼앗기 위해 일제가 짓밟은 목숨 무릇 ‘기해’던가.

현장에서 러시아 군에 의해 일본에 인계된 안 의사는 제네바 의정서조차 무시된 법정에서, 판사, 변호사는 물론 통역조차 일본인에, 일본 정부가 비밀리에 사형 판결 지침을 내린 재판을 받았다. 그들의 뜻대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항소하지 않았다. 목숨을 구차하게 구걸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으리라.

루쉰 감옥에서 최후의 날을 앞두고 흰 한복 옷을 수려하게 걸친 안 의사의 얼굴은 모든 삿된 욕망을 온전히 내려놓은 기품이 흐른다. 안 의사는 뜻을 이루었고, 온건파 이토를 잃은 일제는 강경파들의 계속된 전쟁으로 치달아 마침내 패망하고 만다.

 

이제 우리는 악명 높은 731 부대 흔적을 찾아 한 시간 정도 달린다. 몇 년 전만 해도 현장만 남았던 곳에 ‘기념관’이 섰다. 일본이 세균전을 벌이기 위해, 이길 수 없는 부도덕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저지른 짓들이란.

그것은 차마 동물에게조차 가할 수 없는 짓들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일이지만 6.25 전쟁 중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결코 남의 일만이라 할 수는 없다. 역사의, 국가의, 명분과 논리와 욕망을 접으면 짓밟히고 희생당한 무고한 생명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제대로 볼 것이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이다. 서른한 살 청년의 모습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생명을 공동체의 제단에 바쳐 모두를 ‘구하고’ 홀연히 떠난 사람, 그 넋을 기린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