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幸福)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첫째로 복된 좋은 운수, 행운이라는(good fortune) 뜻과 둘째는 생활에서 부족함이 없이 만족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고 정의한다.

플라톤은 행복이란 만족한 삶이라고 했다. 사람이 만족할 수 있으면 어디에 있든, 무엇을 먹고 입든, 어떤 일을 하던 그것은 행복한 삶이다.

어쩌면 우리의 불행은 모자람이나 결핍에 있기보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결핍감에서 온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느끼는 상대적인 비교의식에서 비롯된다.

에릭 프롬이 말하는 행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삶”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지당하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한 임금이 병에 걸리자 “내 병을 고쳐주는 자에게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임금님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찾아 왔다. 그것은 “행복한 사람을 찾아내어 그 사람의 속옷을 벗겨다가 임금님께 입혀드리게 되면 임금님께서 다시 건강해 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임금님의 명령으로 신하들은 전국을 돌아 다녔지만 행복한 사람은 한 명도 찾아 낼 수가 없었다. 돈 많은 사람은 병이 들었고, 건강한 사람은 가난했고, 가난한 사람은 부인이 악독스럽거나 또는 자식들이 속을 썩이고 있었다. 누구나 다 어떤 불안과 갈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늦게 임금님의 아들이 가난한 오두막집 옆을 지나가다가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일거리가 넉넉했고 배도 부르니 잠을 자야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이지요.”

왕자는 기뻐하며 하인들에게 명하여 그 사람의 속옷을 벗겨오되 그 대신 그가 요구하는 대로 많은 돈을 주고 그 속옷을 임금님께 가져다 드리라고 하였다. 하인들은 그 행복한 사람에게로 달려가 속옷을 벗기려고 하였으나

그 행복한 사람은 너무나 가난하여 속옷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인간의 참된 삶의 행복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좋은 예화이다.

가난하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고 부자라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행복은 감당할 수 없는 큰 기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일일찌라도 기쁨으로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에서 얻어지며, 외부의 환경이나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되며 어떤 사람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미국의 서민 대통령 링컨은 “사람은 자기가 결심하는 것만큼 행복해 질수 있다고 했다.

예수님도 당시 부유층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고 말했고, 복음서에 말하는 행복의 8가지 가운데 첫째가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다.

이제 겨울이 가고 봄의 문턱이다. 오늘도 살아 있음을 감사해야겠다. 그리고 봄이 오는 길목에 꽃 한 송이라도 심어야겠다.

성경은 행복이란 보는 것, 듣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너희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복음13:16)

<김기포 기계중앙교회 담임 목사>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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