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중앙교회 김기포 담임목사
영화 ‘실미도’에 이어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가 대박의 꿈을 터뜨리며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6,25라는 역사의 무대위에서 한 가족의 형제애를 그린 영화다.

형은 동생의 학업을 위해서 구두 닦기를 한다. 맛있는 음식도 자신은 먹지 않지만 동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사준다. 형은 동생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동생의 행복이 형의 행복이고 동생의 성공이 형의 성공이다. 형은 동생을 위해서라면 모든 희생을 감수 한다.

1950년 6월 어느 날, 전쟁이 터진다. 동생은 강제로 징집되어 전쟁터로 동원된다. 형은 동생이 전쟁터로 끌려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한다. 형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 함께 전쟁터로 나간다.

평온한 일상에서 피 눈물 나는 전쟁터로 내 몰린 형과 동생은 훈련받을 시간조차 없이 국군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으로 실전 투입이 되고 동생과 같은 소대에 배치된 형은 동생의 징집해제를 위해 대대장을 만난다. 대대장과의 면담 후, 동생의 제대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된다. 형은 그 무엇보다 동생의 생존을 위해 총을 들며 영웅이 되기를 자처하고…. 결국 형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혁혁한 성과를 거둔다. 어느덧, 형의 목에는 훈장이 걸려진다. 분명 동생을 위한 훈장이다.

그 후, 형은 점점 전쟁의 광기 속으로 매몰된다. 전쟁은 이들 형제의 꿈과 낭만을 무너뜨린다. 애국 이념도 민주 사상도 없이 오직, 동생의 생존을 위한다는 이유 하나로 전쟁영웅이 되어가고 있는 형은 전쟁을 통해 스스로 강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고 끝내 동생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인간의 본능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이념과 사상은 또 한 사람의 인간을 개조 한다, 이 영화는 전쟁이 주는 비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전쟁영화이면서 가족과 형제애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영웅주의를 경계한다.

성경 구약에 보면 두 형 제 이야기가 나온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다. 형인 가인과 동생 아벨은 자기들이 수고한 것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친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생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다.

가인의 믿음과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인이 심히 분하게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께 화를 냈다. 얼굴이 붉게 변했다. 그 후로부터 형 가인은 동생 아벨을 미워하게 된다. 어느 날, 두 형제는 들판에 있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형은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다. 최초로 살인이 시작된다. 그것도 형제 살인의 비극으로… . 가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는 생각, 그리고 동생과 경쟁에서 졌다는 패배감이 결국 형제 살인까지 이르게 되었다.

형제는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미움의 대상도 아니다. 형제는 우애와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고 도와주는 대상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사회는 형제간에 끈끈한 정이 점점 식어간다. 재산분배와 유산상속문제로 서로 등을 돌리며 원수처럼 되어가는 것은 너무나 서글픈 현실이다. 물질주의와 한탕주의가 만든 이 시대 또 하나의 아픔이다.

성경은 형제사랑을 말한다. “형제들을 꾸준히 사랑 하십시오”(히브리서13:1)“형제애를 가지고 서로사랑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시오”(로마서12;10)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쟁이라는 대형 사건에 휘말린 형과 아우, 즉 형제들의 눈으로 바라본 1950년대 한국의 이야기다.

이들은 애정과 갈등, 반목 그리고 화해를 반복하며 형제애, 더 나아가 끈끈한 민족애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는 우리에게 많은 여운과 감동을 안겨준다. 영화 속에 나오는 두형제의 이야기는 각박한 현실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너무나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영화를 보고나면 어느새 많은 사람들의 눈엔 눈물이 고인다. 아직도 우리에겐 따뜻한 정이 남아 있음을 감사한다.

‘태극기 휘날리며’, 어린 시절 동심의 세계에서 뛰어놀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립다.

그리고 이렇게 묻고 싶다.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태극기를 휘날리는가?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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