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자주 산책을 하는 마을 앞에 연못이 하나 있다. 먼 옛날 이곳이 미질부성이었을 때 생활용수를 공급하던 저수지였다고 한다. 오래 방치해서 거의 메워지다시피 한 것을 십여 년 전에 다시 준설하고 주변을 단장해서 주민들이 많이 찾는 휴식공간이 되었다.

몇 해 전부터 빈 못에 연잎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누가 일부러 심은 것은 아니라는데 해마다 뿌리를 벋고 씨를 퍼뜨려서 지금은 천여 평의 못이 온통 연잎으로 뒤덮여 명실 공히 연못이 되었다. 새로 생긴 연못에는 잎보다 꽃이 더 많을 정도로 개화가 왕성해서 여름 한 철 장관을 이룬다.

지난해의 죽은 잎줄기가 거의 다 삭아 내린 유월 중순경에 새 연잎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먼저 수련처럼 작고 갈색을 띤 잎을 수면에 납작 붙게 띄우고 이어서 잎줄기를 길게 뽑아 올려 너울너울 연잎을 피운다. 연잎이 물 위로 올라올 때는 길쭉하게 양쪽에서 돌돌 말려 있어 마치 무슨 사연이 적힌 두루마리 같다. 못 바닥 진흙 속에 무슨 간절한 사정 있어서 무수히 상소문 두루마리를 밀어 올려 연못 가득 펼치는 것일까. 그 상소가 마침내 상통이 되어서 환하게 웃음꽃이 피는 것이고.

여름 연못에는 날마다 야단법석(野壇法席)이 열린다. 흔히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모습을 일컫어 야단법석이라고 하지만, 원래는 ‘야외에 설치된 설법의 자리’라는 불가의 용어였다. 활짝 핀 연꽃은 연분홍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들을 연상케 하고 넓고 둥근 연잎은 초록 양산 같다. 그런 상상을 일으키는 것은 그 모습보다도 여인들의 분 냄새 같은 연향(蓮香) 때문이다. ‘칠월의 연못에 야단법석 열렸다/ 연분홍 치마저고리 초록 양산 운집했다/ 부처님, 아직 안 오시고/ 분 냄새만 분분하다’- 拙詩 <칠월 연못>. 하지만 끝내 부처님은 오지 않을 것이다. 쨍쨍한 햇볕 아래 펼쳐진 장관이 곧 화엄(華嚴)이고 법열(法悅)일진데 구태여 설법이 따로 필요하진 않을 테니까.

비 오는 날에도 즐겨 연못을 찾는다. 우산을 받고 서서 하염없이 비 맞는 연못을 바라보는 동안은 세상의 시름을 잊게 된다. 넓고 푸른 연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는 난타의 공연을 연상케 하고, 방울방울 구르는 빗방울을 하얗게 모았다가 슬쩍 기울여서 쏟아내는 연잎은 바라춤 춤사위를 떠올리게 한다.

‘넓고 푸른 연잎이 하나도 젖지 않고/ 방울방울 빗방울을 모았다가 무거워지면/ 슬쩍 기울여서 쏟아버리곤 하는 동작은,/ 잎을 두드리는 빗물의 난타에 맞추어 추는/ 바라춤 춤사위였다, 비오는 연못은/ 온갖 번뇌 씻어내는 한바탕 씻김굿이다//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세상 번뇌 씻으러/ 연못으로 갈 테야’ - 拙詩 ‘연못으로 갈테야’ 중에서

연못가에는 몇 그루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있다. 경치도 좋지만 여름내 시원한 그늘을 지어서 더위를 식혀준다. 실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능수버들인데 수령은 아마도 내 나이와 비슷할 것 같다. 왕잠자리를 잡으려고 발갛게 익은 얼굴로 이 연못가를 맴돌던 어린 시절엔 큰 버드나무가 없었다. 어린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늠름한 고목으로 자라는 동안 못가에서 잠자리를 잡던 소년은 초로의 늙은이가 되었다.

버드나무가 주는 것은 멋진 경치와 그늘뿐만이 아니다. 까치가 보금자리를 틀고 뻐꾸기가 와서 울기도 한다. 짝을 부르는 뻐꾸기소리는 초여름의 신록을 한층 더 싱그럽고 그윽하게 한다. 뻐꾸기소리가 그친 칠월 초부터는 매미소리가 배턴을 받아 버드나무 그늘을 청량하게 한다. 매미소리가 없다면 여름 풍경은 마치 무성영화처럼 답답하고 더 무더울 것이다.

사람도 나이를 먹을수록 그늘이 넓어졌으면 좋겠다. 아름드리나무의 그늘처럼 연륜을 더한 만큼 넉넉해진 품으로 남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다면 한결 편안하고 든든한 세상이 될 것이다. 지금 내가 이 세상에 드리운 그늘은 과연 몇 평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