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우슈비츠. 이곳에서는 인간으로서 참아낼 수 없는 일들이 자행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결코 참아낼 수 없는 것까지 참아내야 했다. 그런 일을 자행한 사람을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 일을 겪고 살아난 사람도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 아우슈비츠. 이곳에서는 인간으로서 참아낼 수 없는 일들이 자행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결코 참아낼 수 없는 것까지 참아내야 했다. 그런 일을 자행한 사람을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 일을 겪고 살아난 사람도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괴짜였다. 그는 자신이 쓴 편지를 뉴욕의 거리에 일부러 떨어뜨리고 어떤 사람이 답장을 쓰는지를 관찰했다. 일부러 긴 줄에 새치기를 하고서는 뒷사람의 반응을 기록하기도 했다. 날씨가 맑은 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군중들이 얼마나 많이 모이는지를 실험하기도 했다. 로렌 슬레이트는 이러한 밀그램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그는 영리하고, 파괴적이고, 부조리했다. 하지만 그가 사르트르나 베케트와 달랐던 점은 부조리를 측정했다는 점이다.”(‘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66면) 스탠퍼드 대학의 리 로스는 “밀그램 교수는 부조리를 병 속에 담아 저장”했다고 평가한다.

스탠리 밀그램은 ‘권위에 대한 복종실험’으로 유명하다. 이 실험은 나치 독일의 잔혹한 홀로코스트와 ‘미라이 학살 사건’과 같은 비인간적인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실마리가 된다. 베트남의 킬링필드라 불리는 ‘미라이 학살 사건’은 미군이 마을을 약탈하고 강간을 한 뒤 504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사건이다. 홀로코스트는 폴란드 아우슈비츠 포로소용소에 자행되었는데, 600만명의 유대인이 인종 청소라는 미명하에 학살당한 사건을 말한다.

밀그램은 자신이 하는 실험의 의도를 들키지 않기 위해 ‘시간 당 4달러, 기억에 관한 연구에 참여할 사람 구함’이라는 광고를 냈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은 40명이었다. 참여자 둘 중 한 명은 문제를 출제하는 선생 역할을, 또 다른 한 명은 문제를 푸는 학생 역할을 한다. 제비뽑기로 결정되고 선생은 학생을 건너편 방으로 데리고 가서 의자에 묶는다. 그 의자는 전기가 통한다. 선생은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15V에서 450V까지로 서른 개의 버튼을 차례대로 올린다.

450V까지 되는 버튼을 몇 명이나 올릴까? 밀그램을 비롯한 실험진은 0.1%에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기의 강도가 높아지면 학생은 소리를 지르며 여기에서 꺼내달라고 소리친다. 300V가 넘어가자 학생은 대답조차 없다. 선생 역할을 하는 사람이 더 이상 못하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러면 의사 복장을 한 연구자는 “실험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선생 역할을 한 사람이 다시 반문한다. “저러다 죽으면 어떡하죠?” 연구자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모든 것은 제가 책임집니다”라는 대답을 매우 사무적이고 건조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선생 역할을 맡은 피시험자는 결국 450V까지 버튼을 모두 올린다. 그렇게 버튼을 올린 사람이 40명 중 무려 26명이나 되었다.

물론 학생은 안전하다. 그리고 학생은 연구진이 고용한 전문 연기자다. 제비뽑기도 연출된 것이고, 전기는 겨우 간지러운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선생 역할을 한 피시험자는 450V까지 전기가 진짜라고 알고 있었다. 이 정도 수준의 전기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피시험자는 전기버튼을 올린 것이다.

밀그램은 이를 통해 홀로코스트를 자행하는 사람은 악마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라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

이 실험은 사람이 상황에 얼마나 쉽게 지배받는지를, 권위 앞에서 인간의 도덕과 양심이 얼마나 손쉽게 허물어지는가를 보여준다. 만약 15V가 아니라 처음부터 200V에서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버튼을 올리는 데 더 신중했을 것이다. 아주 낮은 전압에서 점점 전압이 높아질수록 피시험자는 자신도 모르게 도덕과 양심이라는 허들을 뛰어넘어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변해갔을 것이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다. 한 번 마음의 허들을 넘고 나면 나머지는 거의 자동적으로 이뤄진다. 그렇게 자신이 지켜야 할 윤리의식은 폐기된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윤리라는 것이 원래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윤리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성립한다. 어떤 사람들과 있느냐에 따라서 윤리는 다른 것으로 바뀐다. 윤리는 가변적이다. 상황에 맞게 윤리를 바꾼다. 우리의 윤리는 그렇게 허약하다. 악마는 외부에서 틈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솟구친다.

이 실험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실험 이후 밀그램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밀그램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실험은 세기의 실험이었지만, 밀그램은 많은 것을 잃었다. 가장 잔혹한 실험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고, 학계에서 따돌림을 받다시피 했다. 예일대 조교수였지만 종신재직권을 거부당했고, 하버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밀그램은 서른 한 살에 뉴욕의 시티 칼리지에서 전임 교수로 채용되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나쁜 조건이 아니었지만 그가 느꼈을 상실감은 컸을 것이다.

이런 밀그램의 삶 역시 ‘권위에 대한 복종실험’의 연장선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밀그램의 실험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했다. 하버드대의 교수였던 조나 골드하겐은 “밀그램의 실험은 유대인 대학살과 관련된 지금까지의 발표 중에서 가장 잘못된 가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의 복종 이론은 적용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신뢰할 만한 권위에 저항을 합니다”라고 비판했다.

지금과 달리 당시 사람들은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얼마나 가변적일 수 있는지, 인간이 얼마나 비겁할 수 있는지,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역시 유대인을 학살하는 나치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 나치의 만행이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밀그램을 비판하는 쪽을 선택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그런 주장을 하는 밀그램을 매장하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이것 역시 악이다. 이것 역시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권위 뒤에 숨어 한 인간을 파멸시키는 일과 다르지 않다. 밀그램을 비난하는 사람들 역시 그들이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려고 했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은 선하다는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밀그램과 그의 실험은 그런 식으로 평가절하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실험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많은 사건들과 유사한 실험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윤리, 도덕, 신념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사회적 구조 속에 매몰되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중요하다.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과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사람을 그렇게 바꾼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특수한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권위 앞에서 상황 앞에서 보다 더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