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길수수필가
▲ 강길수수필가

마리안나의 소박한 꿈이 댕강 잘려나가 버렸다. 오늘 동행하지 않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함께 왔더라면 그녀는 얼마나 서운했을까. 내년 봄 우리 텃밭에서 이루려던 꿈이, 누군가에게 참수 당해버렸으니 말이다.

등산가는 길가, 아파트 단지가 생기며 새로 쌓은 높은 담장 아래 틈. 그 틈바구니에 어떤 연으로 보리 한그루가 살고 있었다. 관심 없이 지나다녀 보리가 패기 전에는 그 곳에 보리가 자라는지 몰랐다.

사월 중순 오랜만의 부부 주말등산길…. 튼튼한 보릿대 하나가 갓 빚어내어 탐스레 팬 초록보리이삭을 처음 만났다. 그 앙증스런 모습에, 아내 마리안나는 곧바로 새 보리이삭 꿈을 꾸었다.

“보리이삭 익으면, 가져 가 내년에 우리 텃밭에 심어야지!”

그녀의 꿈이, 갓 세상에 태어난 보리이삭의 싱싱한 꿈이기도 할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며칠 흐른 날, 일찍 퇴근한 김에 오후등산길에 올랐다. 지난 주말 아내와 보았던 보리이삭에 저절로 눈이 갔다. 이게 웬 일인가. 보릿대는 윗몸 절반이 사라지고 없었다. 눈 씻고 다시 봐도 없다. 실망감이 큰 파도로 밀려왔다. 누군가 일부러 잘라 간 게 분명해 보였다. 이삭만 없다면 아이들이 장난으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보릿대도 함께 잘렸으니 누군가 꽃꽂이재료라도 쓰려고 가져 간 것이라 싶었다.

보리이삭을 자른 이는 횡재라도 한 기분이었을까. 대보 구만리라도 가야 만날 수 있을 보리이삭을, 도심 담장아래서 발견했으니 말이다. 꽃꽂이재료로 쓰였다면, 보리이삭의 마음은 어땠을까. 어느 집이나 다른 어떤 공간에서 꽃들과 어우러져, 폭력에 몸이 잘린 고통도 잊고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데 보람을 느낄까. 아니면 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도 아닌데다, 너무 많은 생명들을 희생시키는 이상한 동물이라고 원망할까.

일주 정도 지난 후, 보리그루는 다시 나를 놀라게 하였다. 어리던 다른 두 개의 보릿대가 웃자라, 푸른 보리이삭이 또 패있는 게 아닌가. 하나는 제법 튼실했고, 다른 하나는 가냘팠다. 불과 열흘도 안 되는 기간에 남은 보릿대 두 개를 열심히 키워낸 보리그루…. 그 힘과 열성이 어디서 나왔을까. 처음 갓 팬 보리이삭 한 개가 잘려버리자, 보리는 얼른 두 개의 이삭을 더 키워낸 것이다. 생명체는 자기가 어디에 있든 환경에 묵묵히 적응하며 굳세게 살아낸다는 사실을, 이 보리그루 역시 팩트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오월이 되었다. 사람에 의해 요절한 형을 대신한 아우이삭 둘은 잘 자라났다. 하지만 아우이삭들도 보기 좋아지자 어떤 사람에게 형 따라 희생되고 말았다. 허전한 내 마음은 신록가지사이로 떠가는 조각구름이 되었다. 구름위로 수년전, 등산로 산기슭에 처음 피어났던 참나리꽃의 일도 떠올랐다. 칠월이면 참나리를 만나러 먼 바닷가까지 여러 해 갔었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 참나리꽃이 피어났으니, 나는 무척 기쁘고 반가웠었다. 그 행복도 그날뿐이었다. 누군가 나리꽃을 보리처럼 싹둑 잘라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우리민족은 세상 만물을 살아있는 존재로 상정하고, 경천애인(敬天愛人)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민간신앙이 전통적자연관으로 면면히 이어져왔다고 한다. 단군설화나 풍수지리설만 보아도, 우리 겨레가 생명의 근원이자 터전인 자연을 숭배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수질, 대기, 화학 등 환경 분야 관련 현장에서 오래 일을 해온 내 경험으로 보아도, 우리 선조들의 전통자연관이 타당하고 아름답게 가슴에 와 닫는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 국민들은 어떤 자연관을 가지고 살아갈까. 지구촌 최빈국에서 근대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아름다운 전통자연관은 없어져가는 듯하다. 자연을, 생태계를 대하며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은 과연 어떤가. 보리이삭이나 참나리의 예에서 보듯, 자연과 생명을 유희의 도구로 삼고 사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