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다시 찾은
박인로의 예술혼

▲ 만약 노계가 아직 살아있다면? 박인로가 ‘미래의 희망’인 아이들과 만나 삶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모습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표현했다. /삽화 이찬욱

‘행장(行狀)’은 고인이 평소 어떤 성품과 몸가짐을 지니고 살아왔는지를 기록한 글이다.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大家)’이자 ‘문무를 두루 갖춘 선비’로 알려진 노계 박인로에 관한 행장을 살펴보는 것은 그가 타자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가장 먼저 이런 대목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박공(박인로)은 허물이 적었다. 다닐 때는 지름길로 가지 않고 입으로는 바른 말만 하였다. … 사람들이 서사(書史·책)를 읽으면 한 번 듣고 바로 기억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글을 잘 지었는데 일찍이 빼어난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박인로의 행장을 쓴 이는 유학자인 정규양(鄭葵陽·1667~1732). 노계가 죽은 이후에 태어난 새까만 후배다.

그러니, 선배 학자에 대한 다소 과도해 보이는 칭찬은 후학이 갖춘 예(禮)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글 싣는 순서
노계 박인로의 생애와 예술세계
노계문학관, 가사문학의 이정표 세우다

영천시, 26일 노계문학관 개관
노계의 일생과 문학 부활시켜
내년까지 ‘노계문학공원’ 조성
현대인과 노계의 예술 어우러지는
지역명소 탄생 기대

 

▲ 박인로를 추모해 세워진 도계서원. 주위 풍경이 아름답다.
▲ 박인로를 추모해 세워진 도계서원. 주위 풍경이 아름답다.

◆ 정규양의 ‘행장’을 통해 본 노계 박인로의 품성

하지만, 행장은 뒤로 갈수록 구체성과 객관성을 드러낸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것이다.

“젊었을 때 대마도를 바라보며 탄식해 이르기를 ‘죽은 제갈량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쫓았는데 내 어찌 왜놈들을 두려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은 넓고 큰 재주를 가졌으나 세상이 이를 알아주지 못했다.”

노계의 담대하고 호방한 무인 기질을 표현한 정규양의 문장은 끊임없이 이어져 이제는 박인로의 효(孝)에 이른다.

“공의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어머니의 노년에는 매양 근심스러워하며 부지런히 봉양하였고, 행여 가난 탓에 어머니를 소홀히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여름에는 잠자리에서 부채질을 해드리고, 겨울에는 몸으로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해드렸다. 아침저녁으로 환히 웃는 얼굴을 보여드리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식음을 전폐해 여러 번 혼절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무장으로 수백 수천의 왜군과 맞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고, 세상이 자신을 몰라주는 걸 탓하지 않았던 군자(君子)였음에도 부모의 죽음 앞에서는 서러워 수저를 들지 못했던 노계의 효행을 기록한 행장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아, 세상에 어찌 이 같은 사람이 다시 있겠는가? 공(박인로) 전에도 공과 같은 씩씩한 무부(武夫·용맹한 사나이)가 없었고, 공 후에도 공과 같이 독서(讀書)를 수행한 선비가 없었다.”

 

▲ 도계서원 인근에 자리한 ‘노계가’ 시비.
▲ 도계서원 인근에 자리한 ‘노계가’ 시비.

◆ 영천시에 산재한 박인로의 흔적들

이처럼 후세에 내세워 자랑할 만한 인물을 가졌으니 고향인 영천시의 자존심과 긍지도 높다. 영천 곳곳에서는 노계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흔적들이 발견된다.

‘도계서원’은 박인로가 세상을 떠난 지 65년 만인 숙종 33년(1707년)에 만들어졌다.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억하고 덕행을 본받아 따르고자 하는 후배 학자들이 적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서원은 1868년 대원군에 의해 훼철(毁撤·헐어 없애버림)됐으나, 1970년 영천시 북안면 현재 위치에 다시 건립됐다. 도계서원의 봄은 활짝 핀 벚꽃으로 눈부시고, 가을은 저수지를 비추는 둥근 달로 아름답다.

서원에는 구인당, 주경재, 사성재 등 박인로 문학의 키워드가 된 문구를 딴 건물들이 자리해 있다.

서원 뒤쪽에는 노계의 위패를 모신 사당 입덕묘(入德廟)가 있어 아직도 그를 기리는 사람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덕(德)에 들어서는 입구’라는 의미를 가진 ‘입덕’이란 단어가 귀하게 보인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인 ‘노계집(盧溪集) 판목(版木·인쇄하기 위해 글씨나 그림을 새긴 나무판)’이 보관된 판각고도 ‘영천의 선비’ 노계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공간이다.

도계서원 앞에서 만날 수 있는 시비(詩碑) 역시 수백 년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선명히 살아 숨 쉬는 박인로 문학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유산.

노계의 묘소는 도계서원 앞 저수지 왼편에 아버지, 형제들의 묘와 함께 자리해 있다.

 

▲ ‘노계집’ 판각본.
▲ ‘노계집’ 판각본.

◆ 작품을 읽으며 느껴보는 노계의 예술적 지향

가사와 시조, 한시 등 다양한 작품을 남긴 노계 박인로. 노계박인로기념사업회가 간행한 ‘신역(新譯) 노계집’을 보면 그의 문학·예술적 성취를 짐작할 수 있다.

아래 시 ‘최상사(崔上舍) 산정을 읊다’에서는 가난하고 겸허하게 살아가려는 노계의 성품이 그대로 읽힌다.

일삼은 건 천 권의 책

평생 낚싯대 하나

하늘이 아껴둔 참된 낙지(樂地)에

높이 괴고 누우니 한가롭네.

 

▲ ‘노계집’ 필사본.
▲ ‘노계집’ 필사본.

아래 인용하는 작품 ‘흥취가 일어’ 또한 인간과 자연 속에서 길을 찾고자했던 박인로의 예술적 지향이 느껴지기에 ‘신역 노계집’ 절창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나이 많고 가난하니 손님은 오지 않고

보이는 건 스스로 날아오는 꾀꼬리 뿐

소나무 창에 낮은 길어 할 일 없는데

다시 한가로운 구름 마음대로 오가네.

노계 박인로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선생은 자연과 삶을 노래한 구도자(求道者)였다”고. ‘구도자’란 길을 찾는 사람을 뜻한다.

그렇다면 ‘길’이란 과연 무엇일까? 노계는 어디에서 길을 찾았을까? 아래 시는 이 물음들에 관한 박인로의 대답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벼슬살이가 밭갈이보다 낫다는 말 말아라

벼슬살이가 어찌 이 밭갈이와 같겠느냐

벼슬길은 때로 영욕(榮辱)이 있는 법

영욕이 없는 이 밭갈이 같지는 않으리.

 

▲ 사진 가운데가 노계문학관, 오른편 위로 보이는 것이 도계서원. 앞으로 이 일대에 노계문학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다.
▲ 사진 가운데가 노계문학관, 오른편 위로 보이는 것이 도계서원. 앞으로 이 일대에 노계문학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다.

◆ ‘노계문학관·문학공원’으로 부활하는 박인로

위에서 짧게 살핀 행적과 사후의 추모 열기, 몇몇 작품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게 노계 박인로의 삶과 예술세계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영천시는 박인로를 현대인의 기억 속에 되살리려는 사업에 꾸준히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 사업 중 가장 주목 받아온 ‘노계문학관’이 지난 26일 개관식을 열었다. 개관식 행사는 영천시와 노계박인로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주관했다.

36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대지 2만7천427㎡·연면적 484㎡로 조성된 노계문학관은 전통과 현대적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룬 디자인의 강당과 전시장, 관리실 등을 두루 갖췄다.

전시장에선 노계의 생애와 예술을 다룬 3D 영상이 상영되고, 가상현실 체험공간과 포토존도 마련됐다.

2013년부터 시작된 공사를 무사히 마친 영천시청 관계자들은 “노계문학관 건립은 우리 가사문학의 이정표를 세운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로 보람과 기쁨을 표현했다.

이제 올해부터 내년까지는 ‘노계문학공원 조성사업’이 이어질 예정이다.

도계서원과 노계문학관 인근 저수지를 활용해 문화산책로를 만들고, 십자형 데크, 분수, 나룻배 등을 설치해 낭만적 풍경을 연출하며, 벚꽃길과 배롱나무길을 가꾼다는 것이 영천시가 세워놓은 계획.

여기에 전망대와 팔각정까지 들어서면 ‘도계서원-노계문학관-노계문학공원’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지역 명소가 탄생하게 될 전망이다.

이 프로젝트가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영천시와 문화·예술계 관계자들의 숙원이 풀릴 날이 머지않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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