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의 지명유래를 찾아서

▲ 금선정.

영주시의 지리는 역사적인 면에서는 삼국이 연관 돼 있고 다양한 문화와 역사적 숨결이 고스란히 간직 돼 있는 고장이다.

지명 유래는 기록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수차례의 행정구역 변화로 지명에 대한 혼란과 중요성이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어 안타깝다. 영주지역 역사에 대한 이해와 중요성을 다시한번 인식시키기 위해 영주의 지명과 전해오는 유래를 재조명 해 본다.

화랑들이 무술 익혔던 ‘달밭골’
퇴계 이황이 첫 장가 든 곳 ‘사일’
조선총독이 만든 신사가 있는 ‘신사골’
신라·조선·일제시대까지 역사성 담아


상망동
조선 영조 때 영천군 봉양면 상망동에 속했다.

▷보름골

현 영광고등학교 부근 마을을 보름골이라한다. 배치암(裵癡巖)이란 선비가 이곳 치바위에서 살았는데 거기서 마을이 보인다고 해 망동(望洞)이라 불렀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이 마을이 고을의 동쪽에 있어 보름달을 가장 먼저 보는 곳이라 해 보름골이라 불렀고, 위쪽 마을을 웃보름골(上望)이라했다는 구전이 있다.

▷사례골

장물도가(구동부파출소옆)앞에서 시내 방향으로 가면 오른편 동산교회 언덕 아래에서 영주여고 입구까지의 마을을 사례(寺禮)라 한다. 영주향교 아래쪽에 옛날 정토사(淨土寺)가 있었다는 사실은 1983년 영주시와 영풍군이 공동으로 발간한 우리 고장의 전통문화에 기록돼 있다. 지금 안양원의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절골 또는 사례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도 이 길은 사례길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 하망동 원댕이 마을.
▲ 하망동 원댕이 마을.

하망동
조선 영조 때 영천군 봉양면 하망동, 성저동의 일부에 속했다.

▷원댕이

영동서 철길 옆 하망동사무소가 소재한 인근에 마을이 있으며 이 마을을 원댕이라 불러오고 있다. 조선 명종 때 고령 박대령이란 사람이 처음 터전을 이루고 살 때 마을 뒤편에 있는 큰 절 마당에 원당지라는 넓은 연못이 있었다고 해 마을 이름을 원당이라 불렀는데 그후 발음이 변해 원댕이가 됐다고 한다.

▷곱작골

동부초등학교 뒤편 골목에서 청구아파트 방향으로 넘어가는 골짜기에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을 곱작골로 불러오고 있다.

이 골짜기는 계단식 밭으로 햇볕이 잘 들어서 농산물 수확이 다른 곳 보다 배 이상 수확한다고해 곱작골로 불리게 됐다고 전해진다.

▲ 영주동 신사골.
▲ 영주동 신사골.

영주동
조선 영조 때 영천군 봉양면 하망동, 성저동 일부와 망궐면 노상동에 속했다.

▷신사골

영주시의회 오른편 골목길을 따라 약 200m쯤 가면 영주초등학교 뒤편 철탄산 기슭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신사골이라 부른다.

1935년 당시 부임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오가 우리 민족의 황민화를 강요하면서 각 군마다 신사를 만들어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셔놓고 매일 아침 참배하도록 했다. 이 당시 마을 아래 영주초등학교 교실 옆에 영주의 신사가 있었는데 신사가 있었던 곳이라 해 신사골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숫골

제일교회 옆 골목을 따라 약 100m쯤 가면 둘리원룸이 있는 곳에서 영광중학교 사이에 철탄산 비탈까지 이어진 오래된 마을이 있는데 이곳을 숫골이라 부른다. 이 마을 뒤편에 뻗어 있는 철탄산 줄기가 호랑이가 잠을 자고 있는 수형형이라 해 마을 이름을 잘수 睡, 골곡 谷자를 써서 수곡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숫골로 불려지게 됐다고 한다.

휴천동, 적서동

▷광시이, 광승

휴천동 사무소 남쪽 거북바위(뚜껑바위)아래에 동부맨션이 있는 마을로 광승이라 불러오고 있다. 조선 중기에 야성 송씨 일족이 이 마을을 터전으로 이루어 살면서 마을 뒤편 골짜기에 신라고찰 광승사란 절이 있었다고 해 마을 이름을 광승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 뒤편 거북바위가 있는 산이 옛날 고을의 외적을 막아주는 토성이라 해 광성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사일

수청거리 마을 앞 국도에서 오른편 사일교를 건너서 왼쪽 농로를 따라 약 400m쯤 가면 경북선 철길 옆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사일이라 부른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을 피해 경남 의령에 살던 오운이 이곳에 이주하면서 마을 앞 서천의 고운 모래가 햇빛에 아름답게 반짝인다 해 모래 사(沙), 해 일(日)자를 써서 마을 이름을 사일이라 부르게 됐다. 조선시대 주변 숲이 울창해 초곡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남평 문씨로 창계 문경동이 우서했으며 사위 김해 허씨가 살다가 퇴계 이황이 이 마을 김해 허씨(첫번째 부인) 집안으로 장가든 곳이기도하다.

▷질바들

노벨리스코리아가 있는 곳이 질바들이다. 옛날 이 곳에 질그릇을 만드는 진흙이 많이 나오고 비오는 날은 온통 질펀하다고 해 질그릇 도(陶), 들 평(坪)자를 써 도평이라 뜻으로 질바들이라 불렸다.

가흥동, 문정동, 고현동

▷대부내

시민운동장 입구에서 우시장 방향으로 600m쯤 가면 오래된 느티나무가 서 있는 갈림길이 있고 그곳에서 왼쪽길로 약 200m쯤에서 굴다리를 지나면 저수지마을이 있는데 이를 대부내라 부른다. 오래된 마을이었으나 광복 후 빨치산 출몰이 잦아 소개령으로 모두 흩어졌다가 최근 다시 마을이 형성되고 있다.

▷한정

제2가흥교에서 장수 방면으로 약 300m쯤 가서 첫 번째 신호등 왼편 제방길을 따라 약 1.4km를 가면 오른편 산 아래 마을이 있는데 조선시대 마을 앞 서천 물가에 박녹이란 선비가 하한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지냈다 해 한정이라 불려오고 있다.

▷서릿골(蟠谷)

조선 영조 때 반남 박씨 박정구라는 선비가 터전을 이루고 살았는데 나을 입구 느티나무 주변 바위돌이 마치 용이 기어가는 모습으로 서리어 있다고 해 반곡(蟠谷즉 서릿골)이라했다.

▷핑구재

귀내마을 입구에서 영광여자중학교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이를 핑구재라 부른다. 겨울에 소백산에서 내려 부는 차가운 바람이 이 고개를 지나면서 핑핑 소리가 난다고 해서 핑구재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 풍기 금계마을 금계바위.
▲ 풍기 금계마을 금계바위.

풍기읍

▷금계촌(金鷄村)

풍기읍 금계리 골짜기에 금계라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닭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 금계바위라 불렸고 이 근처 마을을 금계촌이라 한다. 마을 지세가 금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며 정감록 십승지 중 1승지로 지목 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옛날 이 금계바위 닭의 눈에 해당하는 부분에 빛나는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보석이 탐나 바위에 올랐다가 갑자기 천둥소리와 벼락이 떨어져 죽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금선정과 금선대

금산계곡의 금선대에 금계 황준량이 명명하고 군수 이징계가 바위에 금선대란 글씨를 새겼다고 전한다. 조선 정조 5년 군수 이한일이 높다란 반석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이를 금선정이라 부른다. 금선정에서 서북편 마을 뒷산 중턱에 1565년 황준량이 독서하던 금양정사가 있다.

▷적전들, 윗두들

백1리 속계마을회관에서 약 700m쯤 가서 왼편 농로를 따라 가면 마산 앞으로 작은 들판이 있는데 이곳을 적전들이라 부른다. 옛날 이곳에서 고려와 후백제의 군사들이 큰 접전을 벌렸다 해 접전들이라 했으나 세월이 흐르며 발음이 변해 적전들로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 금선정.
▲ 금선정.

이산면, 평은면, 문수면, 장수면

▷우금

약 400년전 김우익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해 살았으며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형상이 마치 하늘에 선녀가 거문고를 타는 모습과 흡사하다해 마을 이름을 우금이라 불렀다 한다.

▷장골

평은교 다리를 건너면 길 오른편에 작을 골짜기가 있고 이를 장골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평은리가 역촌을 이루고 있을 때 이곳에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있었다 해 장골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멱실

약 300년전 경주 김씨와 예천 임씨가 내성천 연안에 12실의 피난처가 있다고 해 이것에 정착했다. 실자가 든 곳을 찾았다고 해서 멱실이라 불리고 있다.

▷은단지골

두전1리 신교에서 좌측 방향으로 600m쯤 가면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옛날 이 골짜기에 사찰이 있었으나 사찰이 철폐될 무렵 당시 주지가 사유자화를 큰 단지에 넣어 땅에 묻어 감추었다고 해 은분지골이라 불리다가 현재는 은단지골로 불리고 있다.

▲ 단종복위 실패로 피끝마을 지명 유래를 남긴 금성대군의 신단.
▲ 단종복위 실패로 피끝마을 지명 유래를 남긴 금성대군의 신단.

안정면, 봉현면, 순흥면, 단산면, 부석면

▷홍다리

중국의 주자가 구곡선동을 찬양한 홍교일촌이란 글에서 마을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안정면 단촌2리의 유일한 자연부락으로 홍교마을을 가로지르는 무지개 같은 다리가 있어 홍다리란 지명을 붙였다 한다.

▷핏끈

안정면 판타시온리조트에서 순흥 방향으로 낮은 고개를 넘어 동촌 1리에 위치한 자연부락이다. 1456년 세조에 의해 순흥부에 유배됐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던 중 사전에 전모가 드러나 역모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순흥 청다리 밑에서 살해됐는데 그 피가 죽계천으로 흘러 4km나 떨어진 이 마을 앞까지 흘렀다 해 피끝이라는 지명으로 불려지게 됐다고 한다. 지금은 발음이 변해 핏끈이라 불린다.

▷새마

봉현 사리미마을에서 서북편 노좌3리골짜기 방향으로 약 90m쯤 가면 오른편 산비탈 위로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곳이 새마다. 이 마을은 1905년경 입주자가 생기며 새로운 마을이 생겼다는 뜻으로 새말이라 부르게 됐다 한다.

▷달밭골

초암사에서 500m쯤 국망봉쪽으로 오르다가 왼편 시냇물 건너편 골짜기로 들어서면 달밭골로 가는길이 나온다. 달뙈기만한 밭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해 달밭골이라 한다. 달밭골은 옛날 화랑들이 무술을 익혔던 훈련장이란 이야기도 있다.

▷태장리

순흥 비봉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고려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 등 세분 왕의 태를 비봉산에 묻어서 그 아래 마을을 태장이라했다.

▷법수동

단산면 마락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한국전쟁 때 인가가 모두 소실됐다가 다시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이곳 사람들이 남달리 예의가 바르고 법을 잘 지킨다 해 법수동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탑드리

부석면사무소에서 부석사 방향으로 가다 보면 도로변에 동네가 있는데 탑드리라 부른다. 마을에 뱀이 많아 집을 지을수가 없어서 동네에 탑을 세워 뱀을 없앴다해 탑드리라 하고 혹은 탑평이라 불리기도했다.

현재 3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이밖에도 영주 지역에는 위에 소개된 지명 유래보다 많은 곳이 있지만 지면에 다 소개 할 수 없어 일부만 소개한다. 영주/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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