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적으로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 세계는 전쟁 중이다. 그것이 무력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이유에서든 온당치 못한 전쟁은 항상 진행형이다.

“전쟁이란 겁이 너무 많아 자기가 직접 나가 싸울 수 없는 두 도둑놈 간의 싸움이다. 그래서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젊은이들을 모아 군복을 입히고 무장을 갖춰 서로 야수처럼 사우라고 들판으로 내보낸다.(토마스 칼라일)”는 말을 저 전쟁당사국의 통치자들이 들으면 뭐라고 할까.

그 전쟁의 가운데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 몇 천 명도 가기로 결정되었다.

나라 안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정권이 바뀐 지난 일년 동안 단 한시도 조용한 적이 없었던 정치꾼들의 싸움에 진저리가 난다. 그러는 중에 국민들은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또는 집안에서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자에 나이와 직업과 빈부의 차가 없을 정도로 삶의 의욕을 잃은 국민들의 나라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전쟁이나 정쟁이나 마찬가지다.

‘저주받은 아나키즘’(우물이 있는 집 간)은 20세기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이 직접 쓴 아나키즘 저서로 1910년 뉴욕에서 출간되었다.

저자 엠마 골드만은 저 자유의 나라라는 미국에서 정치범으로 구속된 첫 번째 여성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엠마가 꿈꾸는 아나키 사회, 곧 자유로운 인간들의 조직적 행동이 연대의식으로 충만한, 꽃처럼 조화로운 사회가 있다. 엠마의 아나키즘의 목표는 개인의 잠재된 모든 능력들을 최대한 자유롭게 발현하는 것이다. 순수한 아나키스트 엠마의 삶을 통해 우리는 아나키즘의 인간 옹호, 인간에 대한 신뢰, 그리고 인간 해방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우리가 흔히들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하는 아나키즘은 무엇을 고발하는가.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 정치적 폭력, 자유를 위협하는 애국심, 위선적인 청교도주의, 곧 교회와 신과 같은 종교, 여성을 인신매매하고 억압하는 남성중심적 사회, 심지어는 대중들을 현혹하고 광분케하는 대중문화도 폭력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정부(국가) 부정만이 아나키즘이 아님을 이 책을 읽으면 깨닫게 된다. 인간을 위한다는 온갖 사회적 장치들이 실은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러면 그 이상적인 아나키즘이 왜 저주받는가.

엠마와 같은 아니키스트들은 국가에 의해 ‘이단’으로 낙인 찍혔다. 미 맥킨리 대통령의 암살사건의 배후자로 몰려 구속되는 등 골드만이나 아나키스트들은 아무런 연관없는 사건에 단골 배후자로 지목받았다. 사회주의자 또한 이들을 비난했다.

여성주의자들 역시 “여성이 진정한 의미로 인간이 되어야 여성해방이 가능하다”며 보통 선거권 요구를 중요시 않았던 골드만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 어떤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아나키즘이었다.

하지만 근대국가 자체가 의문시되면서 아나키즘은 생태운동 등과 결합하며 다원주의적 사고의 하나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1910년 출간됐던 이 책은 9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아나키즘이 “미천한 지위로부터 인간을 부축해 세우는” 빛나는 철학임을 웅변하고 있다.

전세계에 아나키즘이 몰려오고 있다. 최근 세계 지성계에서는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과 모색이 급증하고 있다. 국가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국가에 대한 불신은 곧 세계질서에 대한 불신이다. 세계는 국가를 단위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국가주도의 민주주의는 다수의 폭력에 불과하고, 끝없는 국가간의 경제 경쟁은 지구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고 환경을 파괴시킨다. 국가는 불평등을 생산하고 그 불평등의 구조를 자신의 존립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정부의 성격이 아무리 선량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독재일 수밖에 없다. 또한 국가는 전쟁을 일삼아 세계평화를 해치고 자신의 국민과 다른 나라의 국민을 죽인다. 이것이 바로 국가가 일상적으로 자행하는 폭력이다.

<이정옥 위덕대 국문과 교수>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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