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순희<br />수필가
▲ 김순희 수필가

겨울 축제가 끝나간다.

우리 어머니들은 대명절인 설날에 칠 일을, 정월대보름에는 오 일을, 마지막 축제인 이월엔 하루를 놀았다. 봄을 알리는 음력 2월 1일 또한 명절이라 이름 붙여 놓고 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일뜸질이 시작되니 마지막으로 노는 날이었다. 일꾼들을 위로하는 날이라는 뜻으로 머슴날, 농사가 시작되는 때라 중화절이라고도 불렀다.

온갖 떡을 해서 나이만큼 먹는다 해서 나이떡 먹는 날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월에는 윷놀이로 하루해가 저물었다. 마당 가운데 새끼줄을 쳐놓고 네가락의 윷을 던지고 모야 윷이야를 외치고, 말판도 없이 `건궁말`을 쓰다보면 금방 허기가 졌다. 짬짬이 참을 먹어야 했기에 집집마다 한두 가지씩 해 온 음식으로 한상을 차렸다. 쑥떡 옆에는 배추뿌리 삶은 것도 콩가루를 뒤집어쓰고 있고 무나물, 콩나물국, 메밀묵도 한자리 차지했다.

이 날은 먹고 노는 날이기에 모든 걸 미리 해 놓는 게 여자들의 몫이었다. 그때에 빠지지 않는 것이 쑥떡이었다. 햇쑥은 아직 키를 키우기 전이라 한 나절을 뜯어 모아도 국이나 끓여먹을 정도였다. 양지바른 곳에 소복이 돋아난 것은 작은 칼로 하나씩 뜯어 쑥털털이나 전을 해먹었고, 그러고도 남은 쑥이 키를 키워 늦봄에 억세지면 낫을 들고 가 쓰윽 베어 한 자루씩 집에 가져와 말렸다. 다음해 묵은 쑥으로 떡을 해 먹기 위해서다.

쑥떡을 하려면 사나흘은 필요했다. 이월을 며칠 앞둔 날에 먼저 콩을 가마솥에 볶았다. 알맞게 볶은 콩이 완전히 식으면 빻기 힘드니 따뜻할 때 디딜방아에 넣고 찧었다. 고은 채로 치고 다시 빻아서 가루를 만드는데 하루해가 갔다. 다음 날엔 지난해 말려놓았던 쑥을 삶았다. 여린 잎이 아니라 억센 쑥대를 다듬었기에 시래기 삶듯 군불을 지펴서 오래 삶아 물러지도록 했다. 다 삶기면 빨아서 하루 정도 물에 울쿼서 쓴물을 뺐다. 또 하루해가 기울었다.

다음 날, 쑥은 물기를 빼 놓고 쌀을 물에 불린다. 불린 쌀을 디딜방아에 넣고 가루를 낸 후 쑥과 섞어서 또 찧는다. 그런 후 솥에 찐다. 떡보자기 째로 넓은 안반에 놓고 떡메로 칠 때에만 남자가 나섰다. 찰지게 떡이 되면 접시로 둥글려 작은 덩이로 나눈 떡에 고소한 콩가루를 묻히면 쑥떡이 완성되었다.

영덕에 사는 경숙언니는 떡을 잘 만든다. 어머님이 편찮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쑥떡을 몇 되나 해 보냈다. 봄 내내 새벽기도 마치고 오는 길에 한 자루, 일마치고 남은 해가 기울 때까지 두어 자루씩 뜯어 데쳐 냉동실에 모아두었다가 쌀 양보다 쑥을 더 많이 넣어 향이 진한 진짜 쑥떡을 만들었다. 꽃보자기에 장미꽃으로 장식까지 해서 이바지음식 보내듯 정성으로 쌌다. 펴 보시는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고 냉동실에 소분해서 넣어두고 하나씩 꺼내 데워 요구르트랑 드셨다. 항암치료가 몸에 겨워 입맛을 잃었을 때 자주 찾았던 음식이 쑥떡이었다. 떡집에서 사온 것은 입에 대지 않으셨다. 뜯는데 삶는데 품이 많이 드니 그곳에서 파는 것은 쑥이 장화신고 건너간 듯 모양만 쑥떡을 흉내 내고 있었다. 몸이 성할 때는 아무 말 없으셨던 어머니였지만 입도 속도 내 것이 아니었는지 속내를 다 보이셨다. 입이 써 질대로 써서 다른 음식은 거의 못 드실 때에도 경숙언니 쑥떡만은 맛나게 드셨다.

어머님을 여의고 첫 제사가 돌아왔다. 생전에 좋아하시던 것을 제사상에 올리고 싶어 경숙언니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두말 않고 쑥떡을 해서 달려왔다. 영덕에서 포항 오는 새로 생긴 기차를 타고 역에 내려서 얼른 떡 상자만 건네고 고맙다는 말도 길게 못했는데 바쁘게 돌아서 갔다. 쑥떡을 올리며 맛나게 드실 어머니 생각에 콧망울이 시큰했다.

겨울 끝을 알리는 봄비가 자복자복 내린다. 어머님이 알려주었던 언덕 그 자리에 올해도 뽀얀 쑥이 어김없이 고개를 내밀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소쿠리랑 작은 칼을 준비해 봄 마중을 가야겠다.

*건궁말 ㅡ머리속에 윷판을 그려놓고 말을 쓰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