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길수<br />수필가
▲ 강길수 수필가

도대체 저런 힘이 어디서 나올까.

영하 10도를 오가는 날씨가 며칠씩, 몇 차례가 지나갔는데 속잎이 살아있다니. 더구나 딱딱한 콘크리트바닥과 벽의 틈바구니에서…. 겨우내 저 잎들과 뿌리는 얼마나 떨었을까. 차라리 얼어 죽기라도 했으면 살을 에는 추위의 고통은 당하지 않았을텐데, 생명의 어떤 힘이 저 잎을 저리도 처절하게 살아내게 한다는 말인가.

어제 저녁, 인터넷을 보다가 믿기지 않는 기사를 만났다. 과학자들이 올겨울 북극의 기온이상 현상에 경악했다는 것이다. 저 겨울민들레는 그 기사가 말하는 기후변화에 온 몸으로 선제대응하며 사는 걸까. 민들레가 살고 있는 온대지방 이곳은 겨울기온이 영하 10도를 넘나든다. 한데, 정작 가장 추워야 할 북극은 영상을 오르내리는 이상기후를 알아채고 민들레는 발열내의라도 챙겨 입었단 말인가.

민들레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바짝 마른 잎을 들춰본다. 추위를 참아내며 사는 푸른 속잎이 내게 물음 화살을 쏘았다.

“아저씨, 그런 생각 마세요. 나도 조상들처럼 겨울엔 어머니뿌리 품속에서 편히 잠자고 싶어요. 어쩐 일인지 지금은 세상이 나를 한겨울에도 깨어있게 만들잖아요?”

그랬다. 도시 콘크리트 좁은 틈바구니에 묵묵히 둥지 튼 이 민들레는, 기후변화시대를 발 빠르게 알아채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게다. 어디 민들레뿐이랴. 낮은 아파트 담장 위에 고개를 내민 장미꽃나무 가지도 물오른 버들가지같이 초록으로 물들어있다. 봄에 겨울잠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식물들이 실은 이 겨울에도 잠들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식물들이 다투어 시대변화에 맞추어 사는 시대를, 과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기후와 환경의 변화, 나라와 국제정치, 경제, 안보상황의 변화 등에 대해 머리로 생각하거나 입으로 말만 했지, 저 민들레처럼 몸으로 살지는 못하고 있다. 이 지방에 제법 큰 지진이 두 차례 지나가도, 겨우 인터넷 통해 가정과 차량용 소화기를 샀을 뿐, 생존배낭 하나 마련하지 않고 대책 없이 살고 있다.

그뿐 아니다. 나라안보가 위태로워도 걱정만 할 뿐, 주위 사람들처럼 아무 일 없는 듯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웃나라 일본이나, 먼 하와이에서도 핵전쟁 발발시의 대피훈련을 한단다. 반면, 우리나라는 가장 다급한 당사자인데도 아무 교육훈련이 없어도 침묵하는 다수 국민의 하나에 끼어 나도 그냥 살아간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간이 무생물, 동물, 식물과 다른 점은 바로 이성과 감성적 존재라는 데 있을 것이다. 이성이란 인식하고, 사유하며, 판단하고, 나아가 실천하는 힘이라 여긴다. 또, 감성이란 환경이나 자극에 대해 올곧게 느끼는 마음의 힘이라 생각한다.

어떤 이는 민들레는 본능으로 살고 있을 뿐인데, 뭐 그런 걸 이성과 감성으로 사는 사람과 비유하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이 말은 식물과 그 본능은 하찮은 것이란 뉘앙스를 풍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이 한겨울에도 민들레 잎이 살아야 하는 기후를 초래하게 되도록 스스로 놔두었느냐고 되묻고 싶다. 인간은 이성과 감성을 물질문명의 편의성 추구에만 몰두하다시피 살아온 건 아닐까. 그 결과 생물의 종은 급속히 줄어들고 온난화로 대표되는 기후변화를 가져왔다면, 인간이 온당한 이성과 감성으로 살아온 존재가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내 눈에 비친 나의 삶은, 비좁은 콘크리트 틈바구니에서 겨울 혹한을 억척스레 이겨내는 민들레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인다.

`각자도생!`

그렇다. 한겨울에도 깨어있는 민들레가 내게 보여 준 이 시대의 화두다. 식물들이 기후변화를 알아채고 발맞추어 자라나며 살듯, 우리시대 사람들도 온갖 변화에 스스로 알아서 살아가야만 하는가보다. 각자도생의 슬픈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