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양봉 교재 유일본 100년 만에 독일서 귀환
백선기 군수 기자간담회
1918년도에 쓰여진 책
왜관수도원은 1952년 건립
정확한 역사 알 수없어도
`최초의 한글기술서` 의미

▲ 우리나라 최초의 양봉교재(등사본 150권 발간) 중 유일본인 `양봉요지` 표지. /칠곡군 제공

우리나라 최초의 양봉교재인 `양봉요지`가 칠곡군 왜관수도원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백선기 칠곡군수는 이제껏 왜관수도원에서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양봉요지의 출처를 뒤집는 의견을 내놨다.

백 군수는 29일 칠곡군청 제1회의실에서 `양봉요지 원본 영구대여 형식 귀환 확정`에 대한 기자간담회를 갖고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양봉요지는 왜관수도원에서 작성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백 군수는 “양봉요지 원본이 실제 왜관수도원에서 작성된 것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지난 2015년 지역의 한 교수가 쓴 번역본에서 원본이 칠곡에서 작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의 내용이 있기 때문”이라며 “모든 자료들을 조사해 봤을 때 양봉요지 원본이 왜관 수도원에서 쓰여진 것은 아니라는 해석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번역본은 원본에 쓰여져있는 O·S·B란 약자를 왜관수도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백 군수는 “O·S·B는 전세계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회 약칭이다. 왜관수도원도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이긴 하지만 이 책은 왜관수도원이 생기기 전인 1918년도 작성됐다”고 설명했다. 실제 왜관수도원은 1952년에 세워졌다.

그는 또 “독일인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한국명 구걸근)가 한국 최초 남자 수도원인 서울 백동(혜화동)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서양의 양봉기술을 한국에 보급하고자 국문으로 제작한 후 선교활동을 하다가 다시 만주로 넘어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수용소에 감금이 되는 등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역사의 사실을 알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와 같은 여러 흔적의 과정을 살펴봤을 때 양봉요지에서 지칭하는 곳이 왜관수도원이 아닐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백 군수는 그러면서 “칠곡군이 전국 유일의 양봉특구지역이고, 양봉요지가 한국에서 작성된 것은 분명한 사실인 만큼 한글로 작성된 최초의 양봉기술서로의 의미만 부여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한편, 칠곡군은 이날 우리나라 최초의 양봉 교육교재인 `양봉요지` 원본을 100년 만에 독일에서 영구대여 형식으로 귀환 확정했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27일 독일 퀸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에서 백선기 칠곡군수와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장 박현동 아빠스,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의 미카엘리펜 아빠스,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단 이사장이 참석한 가운데 `양봉요지 반환식`을 가졌다.

칠곡/김재욱기자

kimjw@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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