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상에서 백록담을 비껴 관음사지구를 향해 돌아내려오는 길. 멀리 사람이 사는 곳엔 미세먼지로 흐렸으나, 1천950m 한라산엔 구름조차 깃들지 않아 맑고 깨끗했다. 사진으로 내가 본 것을 모두 담을 수 없어 아쉬웠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 정상에서 백록담을 비껴 관음사지구를 향해 돌아내려오는 길. 멀리 사람이 사는 곳엔 미세먼지로 흐렸으나, 1천950m 한라산엔 구름조차 깃들지 않아 맑고 깨끗했다. 사진으로 내가 본 것을 모두 담을 수 없어 아쉬웠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새치기

지난 주말엔 한라산을 다녀왔어요. 토요일 새벽같이 비행기를 탄 덕에 아침부터 산행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백록담을 오를 수 있는 산행로는 지금은 네 가지밖에 없나봐요. 먼저 성판악에서 출발해서 관음사쪽으로 내려오는 방법이 있어요. 물론 반대로 관음사에서 올라서 성판악으로 내려와도 상관은 없어요. 그러니 성판악-관음사 코스라고 부르면 되겠군요. 또 다른 방법은 영실-어리목, 세 번째는 돈내코-영실, 마지막으로 돈내코-어리목 코스가 있어요.

저는 토요일에는 성판악에서 올라 관음사쪽으로 내려왔고, 일요일에는 영실에서 출발해서 어리목으로 내려왔어요. 성판악-관음사 코스는 도상 거리가 18.9km예요. 실제 거리는 거의 20km쯤 되는 것 같았어요.

성판악에서 백록담 아래 진달래 대피소까지는 평균적으로 3시간 정도가 걸리나봐요. 그런데 진달래밭 대피소를 낮 12시까지 통과하지 못하면 백록담으로 올라갈 수가 없어요. 저희가 성판악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9시였으니까 딱 3시간이 남았어요. 시간이 빠듯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제가 따라온 이곳 송백산악회 회원분들은 워낙 산을 잘 타는 분들이라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어요. 아니나 다를까 스무 명이나 되는 회원들이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해서 밥을 먹어도 될 만큼 시간이 남았어요.

문제는 진달래 대피소에서 백록담까지 1시30분까지 도착해야 하는 것이었어요. 평균적으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하니 크게 걱정할 건 없었어요. 그런데 주말인데다가 겨울이라 사람들이 엄청 많았어요. 한라산은 겨울산이 예뻐서 많이 찾는다고 하는군요. 정말 그 말이 헛말이 아니었어요. 전부 한라산인지 알았는데 전부 사람이더라구요. 사람은 많고 길은 가파르고 게다가 내려오는 사람들까지 많아서 빨리 오르고 싶어도 오를 수가 없었어요.

백록담은 보고 싶고, 어쩔 수 있나요. 사람들을 헤치고 오르는 수밖에 없었어요. 줄을 서서 더디게 오르는 사람들이 앞서 가는 저희를 보고 앞다투어 한 마디씩을 했어요. 차례차례 올라가야지 이게 무슨 짓이냐고, 새치기나 다름없다고, 저런 사람들이 꼭 자기 애들한테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정말 온갖 말을 다 들었어요.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앞질러 갈때마다 매번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견디기 힘들더라구요. 결국 저는 참질 못하고 “언제부터 산에 줄서서 다녔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어요. 생각해보면 죄송하긴 해요. 왜 그분들인데 빨리 안 가고 싶겠어요. 또 힘들기까지 한데 뒷사람이 빨리 오르겠다고 자신을 밀치면 얼마나 짜증나겠어요. 그날 같이 산행을 하신 분들이 계셨다면 죄송합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정지용의 `백록담`과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

산을 오를 땐 반신반의하게 돼요. 뭐 대단한 게 있겠어 하고요. 산이 다 그렇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정상에 서면 입이 딱 벌어져요. 왜냐면 정상은 늘 제 상상을 초과한 수준의 풍광을 펼쳐보이거든요. 제 생각으로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저 놀라운 자연의 창조력 앞에 엄숙해지지 않을 수 없어요.

재작년 리기산을 오른 뒤 “저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든 인공지능이든 혹은 알 수 없는 미래든 무엇이든 그 경이로움 앞에서 망연자실해지고 말 것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했다”라고 썼어요. 백록담에서도 그런 비슷한 생각이 들었어요. 새로운 것들이 마구 쏟아지는 이 시대에 과학과 기술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 자연일 것이란 생각 말예요.

백록담을 오르며 내내 뇌리를 맴돌았던 건 정지용 시인이 쓴 `백록담`이라는 시예요. 정지용은 가곡으로도 유명한 `향수`라는 시를 쓴 시인예요. 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하는 그 시 아시죠. 또 뭐 `호수`, `별똥별` 이런 시도 있어요. 1938년에 발표된 `백록담`은 `한라산 소묘`라는 부제가 달려 있어요. 이 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산행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매 연마다 번호가 붙어 있는 연시로 총 9수로 이뤄져 있어요. 시가 길어 전문을 실긴 어렵겠군요. 우선 첫 수를 한 번 보시죠.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화문처럼 판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처럼 난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렇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는 별들이 켜 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백록담` 중 1수).

뻐꾹채는 엉겅퀴와 닮긴 했지만 조금 다르다고 하는군요. 한 마루 오를 때마다 뻐꾹채의 꽃키가 줄어들어 나중에는 아주 땅바닥에 붙은 것처럼 짧아진다고 했어요. 생각해보세요. 산은 자꾸 높아지는데 반대로 식물의 키는 줄어들어요. 이 반비례 관계를 시인은 잘 포착하고 있어요. 그런가하면 나중에 이 뻐꾹채는 `성신(星辰)처럼 난만(爛漫)하다` 즉 `별처럼 빛난다`라는 뜻이죠. 뻐꾹채의 키가 자꾸 커져서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키가 줄어들어 별처럼 땅에 박혀 있다니, 정말 절묘합니다. 정지용은 백록담이 너무도 높아 하늘에 오른 것처럼 느꼈나봅니다. 그러니 뻐꾹채가 별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이 시는 닮지 않은 것들을 연결시켜 서로를 연결시키고 있어요. 1수의 `뻐꾹채와 별`을 연결시켰다면, 3수에서는 `백화와 시인 자신`을, 6수에서는 `어미를 잃은 송아지와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을 등치시키고 있어요. 이렇게 말이죠.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가 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백록담` 중 3수).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윈 송아지는 움매― 움매―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백록담” 중 6수).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그런데 1수에서 말을 하지 않고 건너뛴 것이 있어요. 바로 `바람의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선다]`라는 시구예요. 시인은 한라산 백록담을 함경도 끝 즉 백두산 천지를 겹쳐 놓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백록담`이라는 시는 하늘과 땅, 한반도라는 공간 전체, 또 일제에 주권을 빼앗긴 강점기의 전체 시간, 그리고 이 공간과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 이런 것들을 축소하고 압축시켜 백록담 속에 담아내고 있는 그런 시라 할 수 있어요.

이 시의 마지막인 9수에서 시인은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이라고 말했어요. `수지청즉무어`라고 했던가요. 가재가 사는 물이 가장 맑은 물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가재조차 살 수 없는 백록담은 또 얼마나 맑은 것일까요. 정지용은 자신이 살아갔던 그 시대, 그 시대의 한반도라는 공간, 그곳에서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삶이 저 백록담의 물처럼 깨끗하길, 아니 깨끗해지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