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당시 도성 안은 쑥대밭이 됐다. 이듬해 피난 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왕이 머물 궁이 없어 지금의 덕수궁을 행궁으로 삼아 머물게 됐다. 선조가 승하하고 왕위를 계승한 광해군은 본궁을 창덕궁으로 옮기고, 이때부터 이곳 행궁을 경운궁이라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쓰이게 된 것은 고종 때 일이다. 을미사변 등으로 정치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있던 고종이 왕실가족을 경운궁으로 옮기면서 부터다. 고종의 궁호(宮號)를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의미로 덕수(德壽)로 정하면서 덕수궁이 됐다. 고종은 1919년 1월 침전인 함녕전에서 승하한다.

덕수궁 광명문은 침전인 함녕전(咸寧殿)의 정문이다. 지금은 문이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엉뚱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누가 봐도 이상하다. 1904년 함녕전에 불이 나면서 조선총독부에 의해 덕수궁 서남쪽 구석으로 광명문이 이전된 것이다. 현재 광명문에는 문의 기능과는 전혀 상관없이 물시계인 자격루(국보 제229호)와 흥천사명 동종(보물 제1460호)이 전시돼 전시관 형태를 띠고 있다.

문화재청은 최근 심의를 통해 일제 강점기에 옮겨졌던 광명문을 본래 자리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80년 만이라 했다.

현재의 덕수궁은 서울지역에 남아있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훼손되고 사라진 부분이 많아 본래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것에 대한 애정으로 잘 보존해 나가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우리 문화에 대한 자존심만은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이런 점에서 광명문의 이전은 옛것에 대한 후손들의 따뜻한 관심이라 할만하다.

최근 경북 안동 임청각 복원 사업과 53년만의 하회탈 귀향 등을 계기로 우리지역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지역문화재 환수에 대한 열망도 높아지고 있다. 지방분권 분위기를 탄 `문화분권` 운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문화재는 민족의 유산이며 정신이다. 더 많은 관심과 돌봄이 있어야겠다.

/우정구(객원논설위원)

    우정구(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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