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는 다른 그림들의 규모나 크기 화려함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나리자를 찾아 사람들은 끊임없이 모여든다. 이 사진은 일종의 시대적 징후다. `모나리자`를 스마트 폰으로 찍고 있는 한 여성을 다시 찍고 있다. 복제가 복제를 낳아 복제와 원본의 구분이 불가능한 시대, 그리하여 원본 없는 복제마저 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는 다른 그림들의 규모나 크기 화려함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나리자를 찾아 사람들은 끊임없이 모여든다. 이 사진은 일종의 시대적 징후다. `모나리자`를 스마트 폰으로 찍고 있는 한 여성을 다시 찍고 있다. 복제가 복제를 낳아 복제와 원본의 구분이 불가능한 시대, 그리하여 원본 없는 복제마저 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오늘날 과학과 공학기술의 발전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엘빈 토플러가 제1의 물결이라고 불렀던 신석기 농업혁명은 거의 1만 년 전에 일어났다. 제2의 물결이라 불리는 산업혁명은 17세기 말부터 일어났다. 농업혁명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까지 1만 년이 걸렸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채 400년이 지나지 않은 지금 많은 학자들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기술이 생겨난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다.

처음 아이폰이 출시된 것은 2007년이다. 그 후 10년 사이, SNS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스마트폰 앱은 은행, 숙박, 운송 등의 일을 손 안에서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에어비앤비(airb&b), 우버 택시 등 공유경제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였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4:1로 꺾자 호사가들은 인공지능이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수선을 떨기도 한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인문학은 유효한가? 이 물음은 오히려 지금 더 필요한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물음은 지금보다 새 천년이 시작되었던 2000년대 초에 많이 언급되었지만 다시 언급되고 있지는 않다. 당시 한 대학에서는 신입생들을 받을 때 면접문제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모나리자`를 그 세부적인 원자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복제하였다고 하자. 이 복제물은 원본과 물리적으로 전혀 구분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복제물에 불과하지 원본이 될 수는 없다. 원본에는 복제물 이상의 가치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본에 고유한 가치가 무엇인가? 인간의 정신과 역사를 탐구하는 인문학의 의의와 관련하여 설명하여 보라.”(2002년 서울대학교 구술고사 문제)

이 물음에 답함으로써 `인문학은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이 문제는 세 가지를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 완전히 동일한 복제물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제물이 원본을 따라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둘째 원본의 가치는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정신과 역사를 탐구하는 인문학의 의의를 묻고 있다. 그런데 첫 번째 물음인 복제물이 원본을 따라갈 수 없는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는 원본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첫 번째 물음과 두 번째 물음은 동일한 물음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원본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면 자연스럽게 첫 번째 물음에 답할 수 있다.

원본이란 창작물이다. 창작이 경이로운 이유는 그것이 최초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그린 최초의 사람이다. 최초란 처음 시작되었으므로 그 최초를 되돌려 다시 시작할 수 없다. 마치 글자를 익힌 사람이 글자를 다시 배울 수 없고,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사람이 자전거 타는 법을 다시 배울 수 없는 것처럼 최초란 되돌릴 수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글을 배우지 않았다면,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자전거의 앞바퀴를 들 수 없을 것이다. 최초에 행해진 것은 그런 식으로 지속된다.

이후의 모든 행위들 속에는 최초가 깃들어 있다. 최초라는 것, 그러한 최초로부터 우리는 다른 것들을 사유할 수 있고, 그 최초를 발전시킬 수 있고, 그 최초로부터 새로운 최초를 도출할 수 있다. 예컨대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 넣은 것은 뒤샹이 최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없었다면 뒤샹의 최초는 없었을 것이다. 최초는 인식을 확장시키고, 우리의 인식을 뒤흔든다. 원본에는 그런 전복과 자유의 가능성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복제품에는 그런 것들이 담길 수 없다.

벤야민은 원본은 일회적이지만, 지속적이며, 복제품은 일시적이지만 반복적라고 말한다. 일회성이란 단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나리자는 그려졌으므로 더 이상 그려질 수 없고, 그렇게 그려진 것은 지속성을 갖는다. 최초란 이미 시작했으므로 다시 시작할 수 없다. 일시적인 것은 지속과 달리 잠깐 동안 이뤄진다. 일시적인 것을 지속시키는 방법은 반복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복제물은 원본을 아무리 따라한다 해도 이 최초가 가진 가치는 따라할 수 없다.

복제물의 또 다른 한계는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다양성이 사상된다. 똑같은 모나리자를 보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다르게 그릴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뒤샹은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리고, 페르난도 보테르는 뚱뚱하게 모나리자를 그린다. 그리하여 모나리자를 새롭게 변형하고 변주한다. 그 변형과 변주 속에서 우리는 신선함을 느끼고, 어떤 해방감을 맛본다. 하지만 복제된 모나리자는 똑같다는 일시적 놀람뿐이다.

원본에는 최초가 담긴다. 그 최초의 다른 이름은 창의성일 것이다. 창의성은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이며, 새로운 것은 다양한 사고와 다양한 사고의 결합을 통해 도출된다. 그런 점에서 창의성의 핵심에는 다양성이 놓여있다. 이러한 창의성과 다양성은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기도 한다.

자연과학은 자연과 자연현상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지만,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으로 인해 촉발된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창작물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다양하다. 인간의 종도 다양하지만 인간의 생김도 다양하며 인간의 사고도 다양하다. 인문학을 배운다는 것은 곧 그런 다양성을 배운다는 뜻이다.

인문학은 다양한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 다양한 인간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 한 번도 묻지 않은 것들에 의문을 던지게 된다. 지금은 이미 일상적이 된 것이지만, 왜 귀족과 평민은 구분되어야 하는가, 왜 여성은 남성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가, 왜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는가, 왜 우리는 장애인을 차별하는가와 같은 생각들이 싹트게 된다. 그리하여 인문학은 아무도 묻지 않았던 것들에 물음을 던지고, 갇혀 있는 인식과 사고에 균열을 내고 전복한다. 인문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도덕을 발견하고, 새로운 윤리를 창조한다. 인간은 발전되진 않더라도 적어도 확장된다. 그리하여 인문학은 최종적으로 말한다.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고 말이다.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인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다양한 인간들 속에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다양하기 때문에 그 정체성은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어떤 것이다. 곧 정체성을 찾는 과정 속에서 정체성은 형성의 과정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우리가 인간의 내부를 속속들이 알고 그리하여 인간 정체성을 파악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정체성 탐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이 그러하듯 정체성 역시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체성이라고 불려지는 것 위에서 다시 자신의 정체성을 쌓아갈 것이다.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하여 인간보다 더 창의적인 것을 만든다 할지라도 인문학 아니 적어도 인문학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봇 역시 그들의 정체성을 찾는 노력, 그 소실점으로만 존재하는 무엇, 그러기에 멈출 수 없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