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식<br /><br />문화특집부장
▲ 홍성식 문화특집부장

만약 당신의 친구가 어느 날 “그간 너무 고마웠다. 네가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이라며 아무런 조건도 붙이지 않고 10억 원을 준다면 어떤 심정일까? 아무리 친한 지인이라도 10만 원짜리 요리 하나 선뜻 사주기 어려운 보통의 서민들로선 짐작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게 제자 중 하나가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인간에게 친구란 무엇입니까?” 당대의 현자로 불렸던 철학자는 긴 고민 없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친구? 그건 네 몸 안에 깃든 또 하나의 영혼이지.”

친구가 육체에 내재한 정신의 알짬이라 할 `영혼`과 다를 바 없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내주지 못할 것도 없다. 사실 서양만이 아닌 동양에서도 서로의 영혼이 가진 가치를 알아보고 상대방을 지극히 아꼈던 고사(故事)는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백아와 종자기`에 얽힌 백아절현(伯牙絶絃) 이야기도 그런 것이다.

종자기와 백아는 서로의 영혼을 바라보고 이해했던 친구다. 중국 전국시대를 살았던 둘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우정을 쌓았다. 누구보다 거문고를 근사하게 연주하던 백아는 명망 높은 음악가. 그러나 모두가 백아의 연주를 깊이 있게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종자기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다만 몇 마디로 백아의 거문고 연주를 평가했을 뿐. 하지만, 입을 다문 종자기 앞에서 거문고의 줄을 뜯을 때면 백아는 행복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친구` 종자기는 백아가 말하지 않은 것들까지 이해하는 예민한 귀와 명석한 해석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백아가 푸른 산 아래를 날아가는 새를 떠올리며 거문고를 연주할 때면 종자기는 `우아한 학의 날갯짓`을 이야기했고, 출렁이는 강을 상상하는 백아의 음악이 이어지면 종자기는 그 강물 속 비늘 선명한 잉어의 유영을 논했다.

서로가 서로의 영혼을 바라보며 공유하던 이들이었으니, 백아가 종자기에게 주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이라면 10억 원이 아니라 100억 원이라도 주고 싶었을 터.

뿐이랴, 목숨을 주기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귀애하던 종자기가 예기치 않게 죽음을 맞은 날, 백아는 스스로 악기의 줄을 자르고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친구의 사라짐을 세상이 무너진 것으로 본 것이다.

얼마 전 `친구란 무엇인가`를 새삼 고민하게 하는 뉴스 하나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마이클 클레이튼` `오션스 13` 등의 영화로 잘 알려진 할리우드 영화배우 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는 친구 14명에게 각각 현금 100만 달러(한화 10억9천만 원)를 선물했다. 받는 사람이 세금 문제 때문에 고민할까봐 증여세까지 자기가 부담했다고 한다.

10억9천만 원이면 가난한 아시아 국가에선 `팔자를 바꿀 수 있는 돈`이다. 물론 미국이라 할지라도 그 정도 금액이면 결코 사소한 게 아니다. 조지 클루니가 친구들에게 그처럼 큰돈을 선물한 이유는 하나였다. “너희들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배우인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믿었기 때문. 이 믿음은 `영혼의 공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백아와 조지 클루니의 친구 입장에 서본다. 그들은 `또 다른 자신의 영혼`인 사람, 즉 친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의 시간을 가졌으며, 상대를 향한 희생의 마음을 지녀왔던 것일까.

백아와 조지 클루니는 바보가 아니다. 친구에게 진정성이 없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인 거문고의 줄을 끊고, 100만 달러라는 거액을 흔쾌히 내놓았겠는가.

그러니 “조지 클루니의 친구들은 로또복권에 당첨됐다”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면…”이라고 부러워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자문할 일이다. `나는 친구가 겪는 영혼의 고통을 함께 아파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좋은 친구는 좋은 사람 곁에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