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과 전체`(하이젠베르크)를 읽고1

▲ 전자와 원자핵. 원자가 월드컵 경기장 크기라면 원자핵은 축구공만하고, 전자는 그 경기장을 떠도는 먼지보다 작다. 양자차원에서 보자면 원자의 대부분은 허공이며 원자로 이뤄진 인간의 몸은 텅 비어있다고 해도 좋다.
▲ 전자와 원자핵. 원자가 월드컵 경기장 크기라면 원자핵은 축구공만하고, 전자는 그 경기장을 떠도는 먼지보다 작다. 양자차원에서 보자면 원자의 대부분은 허공이며 원자로 이뤄진 인간의 몸은 텅 비어있다고 해도 좋다.

△왜 경험을 통해선 진리에 닿을 수 없는가

`부분과 전체`는 하이젠베르크라는 물리학자의 삶과 그의 삶에서 전방위적으로 벌어진 토론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토론은 친구들과로부터 출발해서 당대 물리학의 선구자였던 보어나 아인슈타인 등 과학, 정치, 문화, 예술 등 하나의 분야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의 논의는 국지적인 부분에서 시작하지만 항상 전체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하여 부분과 전체는 경계가 있으면서 동시에 없기도 했다.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토론은 고등학교 친구인 쿠르트와 로베르트가 벌였던 토론인데 나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쿠르베에게 원자에 호크와 고리를 그려 분자의 결합을 설명하는 물리학 교과서의 그림에는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원자를 이해하려다보니 엄연한 자연법칙의 결과를 무시하고 임의적으로 호크와 고리를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쿠르트는 설사 원자에 호크와 고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경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얻은 결과를 가장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또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 대화에 시와 철학에 관심이 많은 로베르트가 끼어들어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경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결정짓는다고 비판한다. 그들의 토론은 처음에 원자에 관한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인식론 전체에 관한 문제로 확대되어 간다.

로베르트는 경험을 통해서는 진리에 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경험을 통해서는 진리에 닿을 수 없는 것일까? 우선 그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한정된 경험을 통해서 내린 것은 가설일 뿐 진리가 될 수 없다. 이것이 귀납추론에 관한 흄의 비판이었다.

칸트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인간은 이미 경험을 통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은 경험이라는 거울에 비친 환영이다. 경험이라는 거울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깨끗한 거울이 아니라 얼룩이 묻은 더러운 거울이다. 그래서 여기에 아름다운 꽃을 비추더라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추한 꽃이다.

경험으로 진리에 다가설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리에 닿을 수 있는 것일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인식은 경험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 하지만 원자는 우리의 경험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경험과는 무관한 세계에 존재하는 원자를 인식하거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경험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며 어찌 되었든 그 경험 속에서 대상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대상을 인식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런 방식으로 대상을 인식하였다 하더라도 그 인식은 어떤 식으로든 왜곡된 어떤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경험은 한계이자 동시에 자유다.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경험을 사용할 때 대상은 왜곡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적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것이 하이젠베르크의 삶 전반에 걸쳐 지속된 고민이었으며 끊임없는 토론의 핵심 주제였다.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와의 산책을 통해 그 극복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보어는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으로써 차츰 더 예리한 빛에 조사되기를 기대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경험의 축적 속에서 원자 안의 이와 같은 비직관적 현상들도 어떻게든지 파악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러한 보어와의 대화에 대해 “내 학문적 발전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경험을 토대로 원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경험에서 벗어나는 일, 그리하여 “새로운 경험의 예리한 빛”으로 원자를 사유하는 일. 다시 말하자면 고전물리학의 선입관에서 벗어나는 일을 의미하며, 원자를 인간의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의 수준에서 이해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속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이 우리의 경험과는 다른 세계 즉 인과율의 수준을 떠나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1927년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했다.

△작은 문제들과 크고 거대한 문제

이 책을 읽으며 이 천재적인 하이젠베르크에 시샘을 느겼지만, 그나마 만만해보였던 부분은 여기다. 하이젠베르크가 수리물리학을 전공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조머펠트 교수를 방문하는 장면 말이다. 여기서 그는 “사소한 문제들보다는 그 뒤에 가로놓여 있는 철학적 문제에 훨씬 더 흥미를 느낀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조머펠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학생이 이론물리를 한다 하더라도, 학생에게 별로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작은 문제들도 또한 세심하게 다뤄야 합니다. 가령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플랑크의 양자론과 같은, 철학에까지 미치는 큰 문제를 다루는 데서도 초보를 넘어선 사람들이 해결해야만 하는 작은 문제들이 많기 때문에 더 작은 일을 세심하게 해 나가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을 들은 하이젠베르크는 몹시 실망했다고 말한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늘 들었던 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던 영역에서 아직 활동할 준비가 안 되었다는 말이기도 했으니, 그 실망은 더욱 컸을 것이다.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하이젠베르크가 실망하는 모습은 우리를 적잖이 안심시킨다. 우리 역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지난하고 지루한 과정을 건너뛰어 곧바로 거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노래로 치자면 쉬운 곡보다는 남들이 부르기 어려운 곡을 멋 떨어지게 부르고 싶고, 스케이팅으로 치자면 트리플 악셀만을 연습하여 갈채를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모든 것들은 순서가 있고 단계가 있다. 무술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은 무술을 배우는 과정이다. 바로 기술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물을 긷고 빨래를 하고 밥을 짓는 과정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체력을 쌓아 간다. 기본을 충실히 쌓을 때 비로소 무술의 달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천재도 그런 지난한 단계를 밟아나갔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 남들도 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실망할 일은 없다. 더 작은 일을 세심하게 처리해 나가는 지난한 과정과 멋있거나 위대한 업적은 결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행하는 사소한 일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도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업적을 달성할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참 다행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