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

우리에게 있어`대학입시`는 가히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단어다. 한 사람을 성공하게 하거나 실패에 이르게 하는 듯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사회적으로도 온 나라가 대학입시에 매달리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다. 초겨울 보통 추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하필 `수능한파`이며, 대학입시 정부정책의 향배는 온 국민의 관심사일 뿐 아니라 모든 언론의 특급 기사거리인 것이다. 입시날 아침에는 교통이 통제되며 심지어 항공기 이착륙도 관리대상이 되는 것이다. 수험생들을 위하여 백일 기도도량이 펼쳐지고 특별 새벽기도가 올려진다. 대한민국 고교생의 대학진학률이 80%를 넘어, 미국의 60%나 일본의 45%, 독일의 35%는 명함도 못 내미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1970년에는 한국의 대학진학률도 27%에 불과했다고 하니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처럼 독특한 국민이 되었을까. 어째서 대학입시에 목을 매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이를 혹 완화하거나 해소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 나라의 고령화저출산 세태에 따라 인구절벽이 곧 닥친다는데, 그에 따라 청소년 인구도 줄어든다면 대학에 들어가기는 점점 쉬워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아직도 수능은 우리의 톱뉴스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무엇 때문에 좋은 대학 들어가기에 운명을 거는 것일까. 좋은 대학. 이해는 하면서도 아리송한 것은, 이제 시대가 바야흐로 대학의 간판보다는 당신이 실제로 무엇을 할 줄 아느냐가 점점 더 중요할 것인데, 어째서 아직도 우리에게는 출신대학의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이제는 대학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바뀌어야 하고 대학 자신들도 바뀌어야 하며 대학정책도 환경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대학졸업생을 신입직원으로 받을 기업들은 이미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 한다. 엘리트 또는 최고급지성을 길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중세의 대학모델은 이제 대학의 옛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 20세기 초반 고등학교를 High School로 불렀던 까닭이 낡은 생각이 되었듯이, 오늘의 대학이 특급지성을 길러내는 기관일 것이라는 생각도 퇴화해 가는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반적인 지성과 실력을 갖춘 청년인재를 배출하는 기관쯤으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가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청년인구가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현재의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대학들이 속출할 터인데 대학들이 지금처럼 20대 초반의 학생들을 교육하는 모델만 고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대학은 그 문을 전 세대에 개방하여 `평생교육`모델을 적극 수용하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이를 불문하고 새로운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시민들이 언제든지 대학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폭넓은 배움의 현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편, 우리에게 필요한 연구와 개발의 역할은 이미 발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연구중심 대학들과 대학 외 연구기관들이 그 소임을 맡아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학입시`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한 사람이 책임있는 성인으로 자라 지녀야 할 기본 소양과 자질, 그리고 능력과 실력을 습득하기 위하여 진학하는 교육기관 정도로 생각하면 어떨까. 그래서, 진학하려는 대학의 선택도 대학의 이름에 좌우되기 보다는, 과연 그 곳에서 그같은 교육을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인지를 살피며 가늠했으면 하는 것이다.

대학입시. 그 한 판의 승부가 인생 전부를 절대로 좌우하지 않는다. 대학입시 이후에도 삶에 있어 중요한 결정의 고비는 수없이 많을 것이며, 그 때 마다 우리는 오늘 `대학입시`보다 오히려 더 큰 무게로 다가올 굽이굽이를 맞을 것이다. 자녀들과 함께 대학입시 현장에 선 학부모님들에게도 일러주고 싶다. 자녀들의 성공은 `대학입시`에 절대로 달려 있지 않으며, 그들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라고. 지난 시절 경험이 내일 그대로는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