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대추

제사상 위에 올라가는 많은 음식들 중에 내 입맛에 맞는 건 거의 없었다. 아무 맛도 없는 나물이 잔뜩 올라왔고, 바싹 마른 북어 같은 것도 있었다. 그래도 과일만은 좋았는데 유독 싫은 것이 대추였다. 연초록빛의 대추 열매는 가을이 되면 갈색으로 서서히 물들어 갔고, 탱탱한 과육도 볕에 쪼그라들었다. 과즙이 풍성한 배, 사과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대추가 달다는 말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궁벽한 산골, 초등학교 졸업식 날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나무 한 그루씩을 선물해주셨다. 6학년 전체 학생이 채 스무 명도 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이 년 동안 연거푸 우리의 담임을 맡으며 깃든 각별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나무가 자라듯 우리가 자라길 바라며 살구, 자두, 사과 등 온갖 유실수를 사오셨다. 산에서 자란 산골 아이들에게 나무는 반가울 게 없었지만 선물이라는 형식은 낯익은 것도 낯선 것으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대추나무를 안겨 주셨는데 왜 하필이면 다른 나무도 아니고 내가 싫어하는 대추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대추나무는 목질이 단단해서 모진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내가 모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선생님도 알고 있을텐데 아리송하다. 어쩌면 그즈음 `전원일기`(1980)를 의식해서 만든 `대추나무 사랑걸렸네`(1990)라는 드라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겨울에 아이들이 날린 연이 나무에 걸리면, 아이들은 나무에 올라가든 장대를 이용하든 연을 되찾으려 한다. 하지만 대추나무에는 가시가 있어 나무에 오를 수도 없고, 가시에 연이 사방으로 찢겨져버려 연을 찾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겨울이면 키 큰 대추나무에는 연이 많이도 매달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저기 빚이 많을 때를 비유해서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빚 대신 사랑을 넣어 사랑이 풍성한 동네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선생님이 나에게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라고 이 나무를 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훈훈해진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분명 넘치는 사랑을 가진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대추나무처럼 가시도 많은 사람인 것 같다. 더 이상 가시는 안 품고 살고 싶은데 내 입에서 쏟아지는 이 뾰족한 말을 다루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생님에게 받은 나무를 집에 가져와 마당 가장자리에 심었는데, 지금 되돌아 산에라도 심을 걸 하고 후회한다. 우리 집 마당은 여러 차례 변해 지금은 밭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대추나무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밤

어렸을 때는 그냥저냥 지낼 만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아버지는 형과 내게 일을 시켰다. 가을에는 특히 일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싫었던 것이 밤을 줍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산비탈 가득 밤을 심어놓고 책임은 형과 내게 전가했다. 학교를 일찍 마치고 돌아오는 토요일에는 어김없이 밤을 주워야 했다. 밤을 줍기 위해서는 꽤나 중무장을 해야 했는데 밤송이에 찔리지 않도록 장화를 신고, 빨간 고무가 발린 장갑을 끼고 옷도 되도록 비옷 같은 것을 입어야 한다. 머리 위로, 구부린 등위로 밤송이는 허락도 연락도 없이 갑자기 툭툭 떨어지곤 했으니까.

형은 밤 줍기가 싫어서 어디론가 도망가고 결국 나만 밤을 주우러 갔던 날. 둘이 했으면 더 빨리 끝났을 텐데, 혼자 줄행랑을 놓아버린 형을 원망을 하며 떨어지는 밤송이를 욕하며 그렇게 분주하게 밤이 오도록 밤을 주었다. 집에 왔더니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두 한가득 모여 웅성거렸고 더러는 천만다행이라고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전후사정을 들어보니 형이 브레이크가 터진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그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남의 논에 떨어졌단다. 족히 10m는 날아갔던 모양인데 자전거는 윗논에, 형은 아랫논에 처박혔고 날아가며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주변에 일하던 마을 사람들이 난리가 쳐들왔는 줄 알고 모여들었단다. 형은 재수 좋게 논으로 뛰어들어 어디도 다치지 않았다. 그날 나는 밤을 같이 줍지 않은 형에게 꿀밤을 주었다.
 

▲ 경북 달성군 비슬산 용연사. 승방 앞에 매어놓은 감이 가을볕에 자글자글 익어가고 있다. 완전히 마르기 전의 곶감보다는 말랑말랑한 상태의 감을 나는 더 좋아한다. 그런 감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가르면 익은 빛이 과육처럼 걸쭉하게 쏟아진다.
▲ 경북 달성군 비슬산 용연사. 승방 앞에 매어놓은 감이 가을볕에 자글자글 익어가고 있다. 완전히 마르기 전의 곶감보다는 말랑말랑한 상태의 감을 나는 더 좋아한다. 그런 감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가르면 익은 빛이 과육처럼 걸쭉하게 쏟아진다.

△감

우리 동네에는 군수할매가 살았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쩌다 이 궁벽한 산골까지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할매가 군수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는 마을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군수라며 자랑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할매는 말을 제대로 못했고, 말을 하더라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그 말투는 늘 싸우는 것처럼 격앙되어 있었다. 친척도 남편도 자식도 없는 할매는 사람들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감은 봄에는 흰 꽃을 피운다. 꽃은 나중엔 갈색으로 말라붙고 그러는 동안 꽃의 뒤쪽에서 감이 맺힌다. 사과, 배, 이런 과일들처럼 감에도 배꼽이 있다. 이것은 다른 과실들이 그러하듯 꽃의 흔적이다. 하지만 모든 감꽃 뒤에 감이 맺히는 것은 아니다. 감꽃은 묵직해서 쉽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떨어지면 툭하는 소리를 낸다. 그렇게 감꽃이 떨어지면 군수할매는 소쿠리를 옆구리에 끼고 감나무 밑을 누볐다. 나는 어릴 때 이런 할매를 놀린 적이 있는데 이것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할매의 소쿠리엔 감꽃이 가득했다. 감꽃은 떫으면서도 새콤한 맛이 났다.

감은 익어가기 전까지 몇 번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다 익어서는 더 자주 그랬지만, 완전히 땡땡한 땡감일 때에도 감은 떨어졌다. 깜깜한 밤, 감은 툭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양철지붕 위로 떨어졌고, 또 요란하게 지붕의 경사면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 내렸다. 양철지붕 아래에서 잠든 나는 곧잘 놀라 잠에서 깨곤 했다. 이럴 때에도 군수할매는 그 감을 주어 구들목 아래에서 삭혔다. 봄에는 감꽃, 여름에는 땡감, 가을에는 홍시, 겨울에는 곶감, 감은 사계절 내내 좋은 간식거리였다.
 

△이런 날

가을볕은 자글거렸고 논과 밭은 물론 산과 들 사람이 심거나 가꾸지 않은 것들도 익어 추수를 종용했다. 사람들은 바쁘고 분주했다. 이 바쁨 속에는 어떤 흥겨움이 있었다. 밥도 먹고 새참도 먹고, 그럴 때마다 술을 마셨지만 누구하나 취하는 법이 없었다. 아이들은 텅 빈 논을 뛰어다니며 마르라고 세워놓은 볏단을 훌쩍훌쩍 뛰어 넘었지만 누구하나 사고를 쳐 어른들을 방해하는 법은 없었다. 동네 어른들은 취할 때와 취하지 않을 때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아이들도 분별 있게 행동했다.

그런데 이런 날도 있었다. 비가 올 듯 말 듯한 날. 구름이 얕게 깔려 모든 것이 착 가라앉는 느낌이 드는 날.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아 사람들의 기분까지도 누르고 있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이 논 저 논 들쑤시기 좋아하는 참새 떼도 보이지 않았고, 잘 익은 감만 골라 잘도 떨어뜨리던 바람도 어딘가에 처박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새벽에도 낮에도 우는 저 정신 나간 수탉도 요란히 울어볼 만한데 날개 죽지에 대가리를 처박을 뿐이었다. 이런 날은 술래잡기도 숨바꼭질도 신이 나지 않아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마루 끝에 앉아 제풀에 떨어지는 낙엽을 쳐다보는 할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잡힐 듯이 크게 들려왔다. TV는 시작하려면 멀었는데 나는 화면조정을 쳐다보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