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 옆에서 속삭이는 모래, 그 모래를 기어가는 예쁜 자라처럼 어린 시절 악동으로 밖으로 밖으로만 치달아,

하루의 대부분을 낙동강 인도교 아래에 있었다. 혹은, 강 건너 영호루이거나 귀래정의 바위그늘아래에서 보내기 일쑤였다.

이미 아기 팔뚝만큼이나 자란 은어를 줄 있는 검은 운동복 빤스바람으로 쫓아다니거나, 어쩌다 잡은 은어의 배를 따서는 '좋은 냄새' 하며 코를 대고 '큼 큼' 거리기도 하였다.

바위 등을 어루만지는 푸른 물결처럼 낙동강이 도심 한가운데를 감고 흐르는 안동은, 반변천 내성천이 합치면서 비로소 낙동(洛東)의 큰 강을 연다.

택리지에 이르길, 상주의 동쪽으로 흐른다 하여 낙동이라 한다하나, 전하는 말로는 가락(伽洛)의 동쪽을 흐른다 해서 그리 불렀다는 말도 있다. 그 낙동강이, 황지에서 발원한 물이 광비천 현동천 재산천 관창천을 아우르면서 청량산 고운 자태를 안고 광석나루를 지날 때까지는 옛 처럼 자적하던 흐름이 내성천의 안동호와 반변천의 임하댐이 생기고 나서부터 더 이상 고향에 대한 향수의 반추를 어렵게 한다.

안동을 흔히 양반의 고장으로 평한다. 진작부터 싫지 않던 기분이고 덩달아 의젓함을 배우기도 하였다.

'낙 도-옹강 푸른 줄기 감도는 터어에~'로 시작하는 시민의 노래는 글쓴이 또래의 나이면 지금도 누가 먼저 선창이라도 한다면 모두 따라 부를 수 있다.

객지에서 누군가 고향이 어디냐고 묻기라도 하면 '안동입니다'에서 안동은 발음도 똑똑해 지고 한 옥타브 높은 음으로 대답한다. 그만큼 안동사람의 고향사랑은 유별난 데가 있다. 모두 '양반고을'이라는 자부심에서 나온 것이다.

보통 아는 것처럼, 안동의 양반이란 것이 높은 벼슬로 그리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벼슬은 그 가장 하품으로 친다.

의사(義士) 지사(志士)를 으뜸으로, 그 다음이 학문이 높은 선비를 꼽는 것이 안동에서의 양반이다. 그래서 유독 독립투사가 많았다.

수년 전, 안동에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다녀가면서 새삼스럽게 유명해진 곳이 '하회마을'이고 '봉정사'이다.

안동의 유교문화와 불교문화를 대표할 만한 두 곳이다. 그중, 봉정사는 잘 알려진 바,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 건축물 극락전(국보 제15호)과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고금당(보물 제449호)과 고색 찬란한 아름다운 은 단청으로 장식된 대웅전(보물 제55호, 최근 조사에서 극락전보다 더 오랜 건축물로 밝혀졌다)이 있다.

서후면 광평리 가야마을은 안동에서 영주방면으로 가다가 보리고개를 넘으면 모시밭골(저전마을)이 나온다.

여기서 봉정사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오른편으로 틀어있는 길 쪽의 작은 동네가 가야마을이다.

모시밭골과 작은 다리를 경계로 나뉘는 가야마을은 봉정사 가는 길목에 있어서 어린 날 화가의 꿈을 좇아, 주말이면 찾아와 스케치도 하고 도시락도 까먹고, 한나절 놀다 오던 그런 곳이다. 6월이면 밭둑에는 검게 오디가 익어 아이들의 주둥이를 검게 물들이기도 하였다.

이 일대에 다섯 점의 거북바위가 있다.

기가 모이는 좋은 땅은 산이 길게 이어지다가 끝나는 그 곳, 앞으로는 조용한 내가 흐르는 곳이다.

이러한 곳을 '산진수회(山盡水回)'라 하니, 답사에서 우리가 그런 장소를 찾았을 때는 백이면 백 모두 무언가의 인공의 흔적이나 불꺼진 초, 혹은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었다.

그와 같은 곳은 우리 나라에서 바위그림들이 있는 장소와 같아서 우리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런 자리에 바위가 있고, 응축된 기가 있고, 잊혀진 문화가 있다.

<이하우·암각화 연구가>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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