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정혜숙
해넘이가 떠난 7번 국도를 교교히 보름달이 동해를 열어주고 있다.

바람처럼 훌 떠난 여행에서 만나는 선물처럼 달빛은 두고 온 것들에 대해 떠올리게 한다.

앞뒤 분간 없이 달리기만 했던 일상들이 곤두박질에 토악질까지 처대는 요즘이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목을 매었던 나의 감성이 또 한번 현실의 벽을 넘질 못했다.

‘내 마음만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에 용서되지 않을까?’하는 위험한 발상의 결과는 처절한 등돌림을 가져왔다.

아이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의 감흥에 취한 듯 연신 차창 밖 풍경을 내게 쫑알대고 있다. 겉과 속 경계에서 파도치는 달빛도 부대끼는 빛의 서슬에도 아랑곳 않고 나를 응시해주고 있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듯 절절히 내속으로 들어오는 달빛의 손길이 눈물겹다.

지금 나는 ‘태백’이라는 이정표를 따라가고 있다. 오랜만에 전한 내 목소리에 물기를 느낀 그가 ‘한 번 다녀가라’며 불러주었고, 그의 부름에 안식보다 더한 그리움으로 길을 나섰다. 도시를 떠난 사정이 어찌됐든 간에 바람과 세상의 시간은 제자리에서 착실히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의도되지 못했던 관계와 관계는, 결과라는 질긴 뿌리로만 말하라고 했다. 그들이 내게 말했던 소리가 기억나질 않는다. 일순간, 기억이라는 먼지가 망각의 늪에 빠진 착각을 일게 한다.

봄꽃들은 7번국도 북단에서는 아직 동면중이다. 누군가에게 뒤질세라 바삐 걸었던 내 행보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들은 천천히 길을 가고 있었다.

비가 내린다. 마음에서 소용돌이쳤던 동그라미들이 맴을 돈다. 어지럼증을 동반한 두 번의 天災천재를 겪은 ‘가곡폭풍복구지역’의 도로는 폭우가 삼킨 길을 찾느라 이년 째 시간을 잃고 있었다. 사라진 그림자가 이렇게 무섭기는 처음이다.

확연하게 드러나질 않는 그들의 陰影음영은, 두려움의 존재로 다가왔다.

한 시간 족히 가곡佳谷을 헤맸다. 산 정상에 도달하자,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도착지인 ‘태백’에 들어선 것이다.

예측할 수 있는 시야를 극복한 나를 대견해하며 자동차핸들에 한층 더 힘을 가했다.

바로 그때였다. 길이 아닌 지점을 향해 달린다는 것을 깨달은 때가…. 어둠으로 위장한 좌회전 신호는 낭떠러지로 나를 이끌었던 것이다. 순간, 뒷좌석에 탄 아이가 움찔 차 바닥으로 쏟아졌고, 있는 힘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았다.

찰나가 흘렀다. 까마득한 앞 시야를 도저히 감당할 기력이 없다.

“엄마! 나는 괜찮아.”

아이가 바닥에서 꿈틀 일어나 좌석에 앉더니 씨익 웃으며 내게 생수 병을 내밀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가자!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괜찮아질 거야. 나도 지금 괜찮아지고 있거든. 엄마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알았지?”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한참을 마음 추스르면, 다시는 못 벗어날 것만 같았다. 아이의 말이 힘이 되었다.

살아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용솟음쳐왔다. 간당간당 제 몸을 벼랑에 들이민 자동차 앞바퀴를 다시 후진으로, 길로 돌려놓아야만 한다. 그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

날이 밝았다. 간밤의 악몽을 넘어야만 평상으로 갈 수 있다. 눈감고 살아온 시간들이 나풀나풀 봄나비가 되어 나를 흘끔거린다. 살아온 날들에 목이 말랐던 나를 돌이키게 한 시간이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겨울잠 자는 늦은 세상을 깨울 것이다. 그리고 내 삶의 ‘쉼표’ 하나 얹어주고 떠났다.

<정혜숙 수필가 약력>

포항출생

2000년 ‘포항문학’ 신인상, 제6회 ‘동서커피문학상’ 수상

포항문협, 민족작가회의, 보리수필문학회 회원

(현재)높새글방실장, 롯데문화센터 문예창작 강사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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