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금산의 거북바위. 거북이 엉덩이의 한쪽에 그림문자가 있다.
바위문화에 대하여 약간의 글을 읽었다.

이와 같은 바위문화는 우리 나라에서 두 가지로 그 유형이 갈라진다. 하나는 얼굴바위이고 또 하나는 바로 거북바위이다. 우리 나라에는 아름다운 거북바위가 도처에 널리 널렸다. 그 중에서 빼어난 것이 많이 있으니 남해 금산의 거북바위도 그 중의 하나이다.

남해 읍에서 산을 외로 끼고 상주리 쪽으로 가면 오른편에 ‘양아리’마을과 ‘두무포’가 나온다. 이 마을 뒷산으로는 금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양아리의 뒷산 골짜기는 사시장철 맑은 내가 철모르게 흐르고 이 개울을 따라 오르면 그 유명한 상주리 석각이 있는 거북바위가 나온다.

물을 건너서 길을 나서면 온 갓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오래 풍진에 잊고 있던 영감을 깨우는 외진 산길이다.

이 길을 따라 약 30분 여에 거북바위가 있다. 거북바위를 곧장 지나쳐 곧장 오르면 부소암으로 통한다.

거북바위는 엉덩이를 산에 기대고 이제 막 앞발을 들어 일어서는 형용이다. 그 엉덩이 즈음에 서면 형상이 완연한 한 마리 천년거북으로 드러난다. 엉덩이 위에는 그림을 남겼다. 읽히지 않는 그림이다. 아니다. 글이다.

7×4m여의 둥글넓적한 거북바위의 한쪽에 새겼다. 이를 일러서 상주리 석각이라 하고 서불과차라고도 한다.

‘서불이 일어나 솟는 해를 보고 예를 드렸다’해서 ‘서불기배’라는 이도 있다.

전하기에는 동남동녀 500명을 이끌고 불사초를 구해 오마고 떠난 서불이 그가 지나간 곳임을 기념키 위해 남겼다고 하나, 그것은 문자와 유사한 몇 점을 그 해독이 가능하리라 생각되는 부호를 골라서 한자로 읽어본 결과로 보인다. 부호들 중에는 한자와 비슷한 것도 있어서 위치에 따라 요모조모 살피면 그와 같이 읽을 여지가 있기도 하다.

이런 저런 사실을 모두 제거해 놓고라도 이러한 시각에는 큰 잘못이 있다. 그것은 ‘모화사상’에서 온 것으로, 알지 못하는 점에 대해 그럴듯하게 이르고자 할 때에는 뭐든지 ‘중국의 모모한’ 사건과 관련시켜 답하려는 몽매한 사고의 발현과 다름 아니다.

‘위당 정인보’같은 이도 ‘임금, 장상대인이 수렵을 나와서 산짐승 날짐승을 잡으며 건너와 이곳에 기를 꽂았다.’하고는 일러 ‘선사시대의 각석’이라 말할 뿐 더 이상의 언급이 없으니 어차피 오늘의 학문으로 밝혀내지 못할 것 같으면 ‘그건 틀렸어’ 하고 수정해 줄 나중의 누군가 뛰어난 이를 위해 하나의 시도로서 읽어보는 시늉도 괜찮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수년 전 해석을 시도한 적 있다.

“사냥을 하다. (여기에)제단을 설치하고 임금이 잡은 사슴으로 제천 하다.”

시안반포의 고대기호를 참고한 해석이다. 누군가가 얼른 바로잡아 주길 고대한다.

전하기를 남해도 서리곶, 거제도 갈곶바위, 제주도 정방폭 아래에도 이런 것이 있다고 하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거북바위에서 실감 나는 곳은 거북의 머리, 앞발, 꼬리이다. 꼬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리려 길게 선각을 베풀었다. 길고 거칠게 쪼아 자연스럽게 꼬리로 비견된다. 이쯤에서 볼 때나 되어서 거북은 생동하여 이제 막 바다를 가늠한다.

머리는 앞과 옆에서 보았을 때 그를 느낄 수 있도록 눈과 입을 떼어내어 천연인 듯이 하였다. 어설프다. 자연히 그러한 것으로밖에는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른바 ‘후안무치’의 경지. 어느 예술가의 아무도 모르라는 솜씨.

거북 등으로 슬쩍 오른다.

뒤로 금산이 그림처럼 둘렀고, 양옆으로는 든든한 산줄기가 바다를 연모해 드리웠다.

저 바다, 저 앞으로 꿈같이 펼친 양아리 앞 바다. 그 두무포로 이어진 작은 내를 거슬러 입산 한 거북은 이제 다시 만경창파에 둥실 떠 한걸음에 돌아가야 한다. 어느 세월에 다시 오르리. 그래서 아쉬운 듯 거북은 조심스러운 눈길로 돌아보려 한다. 그대로 세월은 멎어 버렸다.

천년이 헛되이 흐르고, 그 돌이 된 거북 위로 내가 올라서 먼 바다를 본다.

<이하우 암각화 연구가>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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