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 논설위원
▲ 안재휘 논설위원

세종대왕은 재위 32년 동안 무려 1천928회의 경연(經筵)을 했다. 경연이란 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연마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일을 말한다. 산술적으로, 세종은 한 달에 평균 5번 이상 신하들과 함께 앉아 치열하게 공부하고 문답을 나누면서 나랏일의 갈래를 잡았다는 얘기다. 어전회의나 경연을 열 때마다 세종이 가장 먼저 한 말은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라는 질문(以爲何如)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군주가 모든 권력을 틀어쥔 왕조시대에 신하들의 생각을 먼저 물으면서 회의를 시작했다는 것은 세종이 `소통`의 가치가 무엇인지, 집단지성의 효용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깨우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 한 아인슈타인의 말은 옳다. 질문은 고민과 사유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좋은 질문은 궁구의 깊이를 더하고 토론에서 올바른 결론을 찾아가는 핵심 열쇠가 된다.

정기국회 국정감사가 시작됐다. 올 국감도 여지없이 문을 열자마자 여야 정치권의 거친 샅바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정권교체가 이뤄진 이후 첫 번째 국감이고, 내년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인 탓에 정쟁의 험상은 예측을 불허한다. 13일 헌법재판소 국감에서 여야는 국회에서 헌재소장 인준이 부결된 김이수 재판관의 소장대행 인정여부를 놓고 거친 충돌을 벌인 끝에 결국 파행으로 치달았다.

헌재의 국감이 시작되자마자 야당 의원들은 소장 권한대행 체제는 국회의 동의를 받지 않은 위법적 체제라며 인정할 수 없다고 막아섰다. 여당 의원들은 야당이 잘못된 사실에 근거해서 국감을 거부하고 있다면서 야당이 국감을 파행으로 몰고 가는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한 헌재에 대한 보복이라고 몰아쳤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서 논쟁에 화염을 키웠다. 문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야당의 국감 거부사태를 “국법질서에 맞지 않는 일”이라면서 “삼권분립을 존중해주실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는 글을 올렸다. 왜 그랬을까.

야당들이 문재인 대통령이 대야 정치공방에 직접 뛰어든 데 대해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다. 자유한국당 전희경 대변인은 논평에서 “비상식적이고 일그러진 헌재를 만든 당사자가 바로 문 대통령”이라고 역공했다. 국민의당 이행자 대변인도 “대통령은 새로운 헌재소장을 즉시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바른정당 전지명 대변인은 “문 대통령의 글은 국회의 임명동의권을 무력화시킨다”고 꼬집었다.

헌법재판소에서의 한판 티격태격은 미구에 몰아닥칠 국감난장에서의 격투 워밍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세 장악을 위한 온갖 폭로전이 난무할 것이고, 민심에 불을 지르려는 선동전은 하늘을 찌를 것이다. 조곤조곤 따져 묻고 귀 여겨 답을 듣는 제대로 된 감사현장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벽력같이 호통을 치고 모멸감을 주는 언사가 난무하는 꼴불견이 짐작된다. 제3공화국까지 존재하던 우리 국회의 국정감사권은 제4공화국 때 부패양산과 관계기관의 사무진행 저해를 이유로 삭제됐었다. 제5공화국 헌법에서 국정조사권으로 변경되었다가, 1987년 제6공화국 헌법에서 국정감사권으로 부활된 우여곡절의 역사를 갖고 있다. 국정감사가 알차게 진행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거나 정쟁의 입씨름 판으로 변질돼 헛바퀴를 돌아 국민들 사이에 `국감 무용론(無用論)`이 퍼지는 현상을 은근히 바라는 쪽은 어디일까.

오늘날 `국정감사제도`는 옛날 왕들이 국정을 이끌어가던 경연의 확대된 형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국민들은 공무원들을 불러다 놓고 마구잡이로 호통이나 쳐대는 비생산적인 권력자랑 국감장을 가장 혐오한다. 경연을 진정한 소통의 정치현장으로 삼았던 세종대왕의 지혜를 본받아야 한다. 전문성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무장한 채 각종 국정의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차분하게 묻고 또 묻는 선량들이 수두룩 나타나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