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헌시인
한가위를 앞둔 9월말이다. 벌써부터 마음이 분주해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문중에서 벌초 공지가 왔다. 이제 팔순을 넘긴 아버지는 문중의 고문으로 벌초에서 자유로워지셨다. 우리 가문에 아버지께서 최고의 연장자라는 말이다. 몇 년 전이었던가 문중 어르신들께서 벌초하시다가 하신 말씀이 문득 떠오른다. “이제 다음 차례는 아버지다”고 하셨는데 그 때는 농담 반 진담으로 들어서 그런지 별 대수롭게 않게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래도록 그 말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알 수 없으나 아버지께서는 그날 이후로 문중 모임에도 벌초에도 더 이상 오시지 않으신다.

성경에 다윗 왕이 솔로몬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유언에서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라는 말이 열왕기상 2장 2절에 나온다.

모든 사람들은 모두 이 길을 갔고, 지금도 가고 있고, 앞으로도 갈 것이다.

이 길에서 예외 된 인생은 아무도 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게 될 아버지를 위해 오래전 계획해 놓았던 추모동영상을 만들었다. 먼저 아버지의 팔십평생을 인터뷰하고, 함께 해 오신 어머니의 삶을 조금 곁들였다. 일상에 바쁜 삼형제들도 모두 약속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기억 속의 아버지는 항상 부재중이었다. 마치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 속에 부재중이듯…. 아버지는 내 유년의 사진작가였다.

터울이 5년씩 가지런한 삼형제는 아버지의 치밀한 가족계획 덕분에 성장하면서 위계질서가 확실하여 싸울 일이 별로 없었다. 인터뷰 속의 아버지는 삼형제가 살아온 연수만큼의 공평한 기억으로 되살아났다. 아버지를 회상하는 기억 속에서 장남은 자신도 모르게 감정의 굴곡을 겪기도 했으나, 삼형제는 모두 아버지라는 프리즘을 통해 유년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그리고 그때를 그리워하고 가족의 의미를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아름다운 소풍 같은 가을날의 한나절을 보냈다.

빛바래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 부모님은 내가 결혼할 때보다 더 새로운 신랑 신부의 모습이었다. 이 한 장의 사진 속에는 함께 해온 50여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함께 해온 쉰 다섯 해의 세월을 되돌아본다. 높은 산과 깊은 강을 함께 건너온 부부이기에, 한결같은 사랑으로 동행해온 세월이기에, 함께 해온 세월만큼의 사랑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제, 나도 아버지가 되어 지천명에 이르고 보니 부모님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가장 사랑했을 때는 `차마 사랑한다` 고 말하지 못했던 그 시절이 지나가고, 아버지라는 말,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가슴 한 켠에서 밀려온다. 살아가면 살아갈 수 록 더욱 그러하다.

이번 포항문학 44호 기획 특집 `작가의 어머니를 찾아서`를 진행했다. 지역 작가 6인의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시인, 동화작가, 소설가로서 그들이 글 마당에서 노닐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 어머니였을 것이다. 가장 기대고 싶었던 이름, 기대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머니였다.

우리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의 생애가 얼마나 더 남아있는지 알 수 없듯이, 앞으로 가족들이 모일 수 있는 한가위도 몇 번이 더 남아 있는지를 ….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남은여생을 되돌아 볼 수 있듯이, 이번 추석은 가족들과 더불어 의미 있는,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추석계획을 세우는 것은 어떨까?

이번 추석을 더 기다려온 이유는 유난히 길어진 연휴 기간이어서도 아니고, 세상사는 일이 갈수록 만만치 않아서도 아니다. 비록 연로하시지만, 부모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이며, 사랑하고 공경할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