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 꿈은 평균 두 가지는 유지했던 걸로 기억된다.

하루에도 열두 번이나 둔갑하는 어린 꿈들 중에서 그래도 성인이 될 때까지 끈기 있게 살아남은 꿈들이 있다.

첫 번째는, 자주 내 입에서 쫑알대어져 햇빛을 받았다. 바로 그 꿈은 교사이다.

어른들께 사랑받기 위한 방편으로 ‘선생님’이란 꿈은 자주 광명을 찾았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교사가 되는 꿈’은 답답한 일상에 족쇄가 채워진 미래로 보였다. 하얀 분필가루가 늘상 옷자락에 늘어 붙어있는 선생님들을 뵈면서 미지의 세계로 자유를 갈망하는 열여덟 갈래머리 여고생 눈에는 한없이 답답한 꿈이었다.

두 번째로,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만이 가슴 깊이 간직했던 꿈은 ‘노래 부르는 가수’이다. 정말로 가끔씩 부모님께 의사타진하다 무참히 뭉개져버렸던 ‘가수’는 가보지 않고도 가시밭길임을 내게 전해주었다.

어린 날을 돌아 서른 해를 훌쩍 큰 내 꿈들을 가만가만 되짚어보면, 그런대로 성공가도를 달린 듯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오늘의 ‘글짓기선생님’이라는 자리와 조금 쑥스럽기도 한 이십대 초반에 경험한 ‘뮤지컬 배우’가 오늘날 내 꿈의 결과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정선생!’이라는 호칭이 이제는 내 이름 석자보다 더 자주 불려지고 있다.‘선생님!’이라는 호칭 앞에서 오래지만 ‘가르치는 일’에 자만했던 과거가 몹시 죄송스럽기도 하다.

앞으로 갈 길에서 가수보다는 선생님의 길이 장수할 모양이다. 그런데도 굳이 나는 과거 일 년의 경력뿐인 뮤지컬에서 노래 불렀던 기억을 자주 들춘다. 간간이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 앞에다 열여덟 해나 삭혀진 팸플릿 사진을 지갑 속에서 의기양양하게 증거자료로 꺼내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하곤 한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긴데, 미국하버드대에서 사회학교수가 학생들에게 꿈이 있냐고 물었다.

전체학생 중 ‘꿈이 있다’고 말한 학생들은 절반도 못 미쳤다. 꿈이 있다고 말한 학생 중에서도 그 꿈을 글로 적은 학생은 10%밖에 되지 않았다.

20년이 되어 조사를 맡았던 교수가 학생들을 찾아보니 꿈이 아예 없었던 학생들은 명문대를 졸업했으나 제대로 길을 찾지 못했는지 소식조차 알 길이 없었다. 꿈은 있었으나 글로 적지 않았던 학생들은 사회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는 정도가 확률로 반 정도였다니….

그렇다면, 꿈도 있고 그 꿈을 소중하게 적은 학생들은 사회구성원의 굵직굵직한 자리에서 ‘성공’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은, 일기장이나 생활기록부 ‘장래희망’란에 착실히 자릴 잡고 있어서 정확하게 실현되었고, 가수로의 꿈은 당사자에게서도 천대받은 탓에 잠깐의 바람으로 내게 왔다갔다.

글짓기 시간에 아이들에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공책이나 수첩에다 꿈을 적어라 시켰다. 그러한 일을 시킨 내게도 보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아이들의 진짜꿈이 몹시 궁금하기는 했지만 참기로 했다. 성스러운 아이들 꿈에 부정이라도 탈까? 하는 최소한의 배려에서이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들은 머루보다 더 깊은 눈망울을 굴리며 연필 쥔 손에 힘을 주며 누군가 볼까봐 몰래몰래 제 꿈을 썼다. 나도 아이들을 따라 핸드백 속 수첩에다 꿈을 적었다.

‘그 나이에 무얼 더 될 게 남았냐?’고 누군가 물을지는 모르지만 아직 내게는 최소한 두 가지 정도의 꾸어지는 꿈이 있다. 비밀이지만….

<정혜숙 수필가 약력>

포항출생

2000년 ‘포항문학' 신인상, 제6회 ‘동서커피문학상' 수상

포항문협, 민족작가회의, 보리수필문학회 회원

(현재)높새글방실장, 롯데문화센터 문예창작 강사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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