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 시전집민영 지음창비펴냄·시집

`문단의 작은 거인`이라 불리는 한국 시단의 원로 민영(83) 시인의 시전집(창비)이 출간됐다.

1959년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60년 가까운 시력(詩歷)을 쌓아온 시인은 우리 역사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밀도 있는 서정적 탐구와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깃든 견결한 시세계를 일관되게 보여줬다.

이번 전집을 준비하면서 시인은 첫 시집 `단장(斷章)`(1972)부터 마지막 시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2013)까지 아홉권의 시집에 실린 409편의 시를 한편 한편 일일이 손봤으며, 여기에 최근작 10편을 더했다. 이 전집을 통해 목숨의 불꽃이 다하는 그날까지 시를 쓰는 것만이 유일한 노동이자 기쁨이라 여기며 평생을 오로지 시의 외길을 걸어온 노시인의 연륜과 기품이 서린 시정신을 엿볼 수 있다.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해방 후에는 여러 객지를 떠돌면서 신산한 삶을 살아온 민 시인은 실향민으로서 분단의 아픔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끊임없이 노래해왔다. 그런 만큼 그의 시편은 철저히 고향에서 발원해 고향으로 귀일하려는 생래적 슬픔을 오롯이 담고 있다. 이렇듯 “두고 온 고향 생각”(`용인 지나는 길에`)과 아련한 추억 속에서 “저 멀리/북만주 땅에 누워 계”신 아버지와 “저 산 너머/용인 땅에 누워 계”(`다시, 이 가을에`)신 어머니를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은 사뭇 애절하기만 하다. 비록 “육신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고요히 감은 영혼의 눈”(`꿈`)에는 또렷이 떠오르는 고향 마을을 애달피 노래하며 노경(境)의 시인은 늘 그리운 향수에 젖곤 한다.

시인은 단아한 형식 속에 민중적 정서를 민요조 가락에 실어 일상의 소재를 평이한 언어로 형상화한 서정시의 한 절정을 일궜다. 그러나 시인의 관심은 비단 평온한 서정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노숙자들이며 철거민들처럼 “작고 하찮은 목숨”(`별꽃`)을 살아가는 소외된 존재들에게도 애틋한 연민의 눈길을 건넨다. 그런가 하면 “몸 안에서 출렁이던/생명의 물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모기에 관한 단상`)는 그 자신은 겸허한 자세로 삶을 받아들이며 황혼의 길목에서 “눈부신 여명을 맞이하기 위해”(`여명`) 희망의 불꽃을 지핀다.

등단 이후 줄곧 올곧은 시정신을 견지하며 “소용돌이치는 탁류의 세월”(`바람 부는 날`) 속에서 “슬픔으로 얼룩진”(`流燈`) 역사를 깊이 투시하며 서정성을 추구하던 시인은 후기에 이르러 존재의 근원에 대한 깊은 성찰과 차분한 관조의 세계를 펼쳐왔다. “흙에서 태어난 자는/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만추`)는 삶의 진실을 되짚어보고, 때로는 “거칠고 사나운 역사”(`이 가을에`)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면서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대한 울분을 토로해내기도 했다.

스물다섯에 문단에 나와 “전쟁의 불길과/혁명의 연기로 뒤덮인 세기말”(`묘비명`)의 시대를 헤쳐온 시인은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천민자본주의의 나라”(`오월, 그리고 어느날`)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때로는 서글픈 일이기도 하지만 시인은 자신의 시가 “순금의 燈”(`국화`)이 돼 이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윤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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