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형<br /><br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최근 언론을 통해 보는 국민들의 표정은 흡사 첫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다. 첫사랑! 이 말을 한 단어로 정리할 수야 없지만 첫사랑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아마 “설렘·기대감·두근거림” 아니면 “눈물·아쉬움·이루어질 수 없음” 등이 아닐까.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 순간, 나는 / 뉴턴의 사과처럼 /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 심장이 / 하늘에서 땅까지 /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 첫사랑이었다” (`사랑의 물리학`)

분명 언론에 비친 사람들, 특히 비정규직 등 그동안 온갖 차별과 서러움을 받아오던 사람들의 표정은 분명 이 시의 주인공 같다. 이들을 이토록 설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첫사랑이라는 단어보다 더 이들 가슴을 뛰게 하는 “임기 내 비정규직 0”과 같은 이야기이다.

비정규직의 서러움은 정말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필자 또한 오랜 비정규직 생활을 했다. 어쩌면 그 때의 서러움으로 더 악착같이 일하는지도 모른다. 비정규직 없는 사회, 정말 그런 사회가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두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간곡히 바란다. 같은 일을 해도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천대와 멸시를 당하는 비이성적 사회가 하루 빨리 없어지기를. 정말 그런 사회가 꼭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지. 지금 분위기로 본다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말이면 다 되는 사회이니까. 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 또한 절대적이니까. 재원이 부족하면 그들이 사재를 털어서라도 해결하리라 믿어본다. 세상일이란 모두가 다 같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시소 이론처럼 한 쪽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한 쪽이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한 쪽이 너무 높이 올라가면 반발은 자연적으로 더 커진다.

지금 갑자기 올라가는 쪽을 보면 마치 한풀이를 하듯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을 언론들은 최대한 미화(美化)하여 보여준다. 점심 값이 어떠니, 낡은 구두가 어떠니 등 이 나라 언론들은 정말 수필 소재를 찾는데 사활(死活)을 건 작가처럼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업무 지시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업무 지시를 보면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일도 있지만 과거에 대한 일도 많다. 물론 과거에 대한 평가는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과거를 평가한다면 그 기준은 결코 객관적이지 못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인지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과거 관련 일들은 과거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라기보다는 과거를 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과거를 캐는 이유는 지금 또는 앞으로 할 일에 대한 명분 쌓기, 또는 분위기 조성을 위한 것이다. 그 명분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과거에 대한 집착은 도를 넘는다.

꼭 과거를 평가하려면 그 범위를 더 넓히면 어떨까. 왜 꼭 17대와 18대 과거에 대해서만 평가하려는 것인지.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식으로 과거를 본다면 시소를 움직이는 힘은 지금의 반대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벌써 시장에서는 말한다. “북한은 대화의 상대로 생각하고, 우리의 과거는 모조리 적폐라고 하니 개혁의 칼이 아니라 복수의 칼이라고 해라.”

우리 국민들이 오랜만에 느끼는 첫사랑의 행복감이 오래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속설을 깨고 이번만은 꼭 이뤄져 모두가 불평등도, 차별도 없는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시소는 균형을 이뤄야 한다.

그런데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되는 시가 왜 자꾸 입에서 맴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