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복부통증·요통·다리저림까지
골반염으로 치료받아도 그때 뿐
직장마저 그만두고 병원 내원
초음파·MRI 검사로
자궁·골반까지 번진 염증 찾아내

“선생님, 많이 보고 싶었어요.”

키 170㎝ 정도의 늘씬한 젊은 여성이 진료실로 들어오자마자 인사하며 대뜸 손을 잡았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순간 당황했다. 환자 얼굴은 화장하고 머리카락을 정돈하면 좀처럼 알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진료 기록을 보면 단번에 기억이 떠오른다. 이날도 황급히 컴퓨터 속 수술 기록을 보고서야 “와! 반가워”하고 답했다.

3년 전 일이었다. 친한 후배 소개로 병원에 온 환자는 2년 전부터 생리통이 심해 일상생활이 힘들다고 말했다. 밑이 빠질 것 같은 통증과 요통, 다리 저림도 있었다. 대도시에서 직장생활 하던 그는 새벽에 대학병원 응급실을 수차례 오갔다고 했다.

당시 병원에서는 열이 나고 염증 수치가 높은 점, 하복부 통증으로 보아 골반염으로 진단했다. 환자는 입원 후 일주일간 항생제 치료를 받았다.

증상이 호전돼 퇴원하면, 다음 생리 때 같은 증상이 반복됐다.

무엇보다 환자는 왜 자신이 골반염 진단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골반염은 성관계를 통해 박테리아 균이 골반까지 침투해 염증과 고열, 통증을 동반하는 질환이다. 미혼인데다 최근 1년간 남자친구가 없었던 환자는 어떻게 균이 질과 자궁경부, 자궁내막을 거쳐 골반으로 들어가 염증을 일으키고 통증을 주는지 의문이었다.

정확한 원인을 일지 못한 채 환자는 매달 같은 증상은 겪었다. 결국 방귀를 뀌는 일조차 고통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직장까지 관둬야 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국내 최고 대기업 본부에서 근무하던 화려한 생활도 통증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환자는 타지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경주로 내려와 쉬던 중 우리 병원을 찾아오게 됐다며 그간의 사정을 얘기했다.

원인을 모르겠고 해결방안도 보이지 않는다며 언제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답답한 마음에 눈물만 흘렸다.

예쁘고 똑똑하며 무엇하나 부족함 없는 젊은이가 원인 모를 통증에 처음으로 인생의 쉼표를 찍었다며 좌절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일단 정밀 검사를 시작했다. 염증이 보였고 하복부 압통도 심했다. 조심스럽게 자궁경부와 직장 사이 공간으로 초음파 기구를 밀어 넣었다. 환자는 비명을 질렀다.

골반의 깊은 곳에 그리고 직장까지 침범한 자궁내막 세포로 인한 염증과 통증임을 감지했다.

환자는 특히 생리 직전과 생리 중에 통증이 심하다고 말했다. 이때 양다리 모두 저린 듯한 통증을 느꼈고, 배변 시 항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MRI검사 결과 이미 병변이 직장까지 파고들어 염증을 일으킨 상태였다. 자궁천골 인대와 복막 아래 혈관, 신경까지 번져 생리가 아닌 때에도 요통이나 다리 저림을 유발한 것이었다.

이어 수술을 진행했다. 환자 배꼽을 1㎝가량 절개하고, 다른 3곳도 0.5㎝ 절개해 기구 삽입 후 골반을 살폈다.

예상대로 환자 증상의 원인은 자궁내막 세포들이 골반 속으로 퍼져 자궁 뒷면과 직장 앞면 사이 골짜기 같은 공간에 착상한 탓이었다. 출혈과 유착이 매달 반복되면서 병변이 뭉쳐져 있었고, 복막 아래까지 파고들어가 신경과 혈관 주위까지 염증과 흉터를 만들고 있었다.

장기 사이의 유착을 박리 해 정상적인 골반 상태로 만든 후 복막을 걷어냈다. 복막 아래까지 침투한 병변은 혈관과 신경을 보존하며 제거했다. 일부 직장을 떼어내 다시 이어주는 수술로 마무리했다. 생각보다 직장 병변이 커 봉합하는 데 오래 걸렸다.

수술 후 환자는 3일간 금식했다. 새로 이어준 직장이 아무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한 달 간 부드러운 음식을 먹으며 경과를 지켜봤다.

다행히 환자는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다. 수술 후 첫 생리 때에는 그동안 환자를 괴롭히던 배변통, 생리통, 다리 저림, 요통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환자가 오랜만에 진료실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최근 직장으로 복귀해 해외업무를 맡았다며 기뻐했다. 진료를 받은 뒤 문을 나서며 “이젠 방귀를 뀌어도 아프지 않아요”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