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 논설위원
▲ 안재휘 논설위원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6백여만 명의 유태인 학살을 비롯한 끔찍한 세계사적 범죄를 저지른 독일의 비극은 1934년 투표율 95.7%, 득표율 88.1%로 히틀러 총리를 대통령직까지 겸할 수 있는 총통으로 뽑은 선거에서 시작됐다. 그들은 직접선거로 지도자를 뽑았기 때문에 독일을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부했고, 스스럼없이 전쟁과 학살 범죄를 저질렀다. 단지 선거제도를 준수한다는 것만으로 올바른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5월 9일에 치러질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이 후보선출 과정에 돌입했다. 예기치 않게 닥쳐온 조기대선을 향해 뛰는 주자들의 발걸음이 바쁘기 한량없는 시점이다. 이번 선거에도 어김없이 주자들 간의 유치한 `빨간딱지` 붙이기 놀이에 불이 붙었다. 상대방의 `과거` 쓰레기통을 뒤집어엎어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나오면 악의적인 침소봉대와 왜곡을 잔뜩 `처발라` 동네방네 쌍나팔을 불어댄다.

단기간 펼쳐지는 선거일수록 네거티브 전략이 큰 효과를 본다는 특성 때문에 이번 대선에서도 음모가 활개를 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과거 대선과정에서 저질러진 추악한 흑역사들을 뚜렷이 기억한다. 역대 대선에서 가장 강력했던 네거티브 캠페인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상대로 한 `두 아들 병역비리 의혹`이었다. 이 전 총재는 유리한 판세에도 불구하고 이 의혹에 발목이 잡혀 두 차례나 낙선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회창 전 총재의 아들 병역비리는 결국 무혐의 처리됐고, 의혹을 제기한 김대업씨는 형사처벌까지 받았지만 대선은 이미 끝난 뒤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 당시 70대 초반의 고령이라는 이유로 상대측으로부터 치매에 걸렸다는 공격을 당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당시 최태민과의 사이에 딸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돼 곤욕을 치렀다.

이명박 전 대통령 또한 `BBK 주가조작` 사건 관련 의혹에 휘말렸었다. 김대중·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들은 모두 제기된 의혹들을 `정면 돌파` 방식으로 극복하고 당선장을 거머쥐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회창 전 총재는 결국 상대의 네거티브 캠페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게 패인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선거판에서는 상대방의 네거티브에 대응하고 극복하는 능력도 주요한 평가덕목으로 치부된다.

각 정당들이 후보를 결정하는 과정에 돌입했고, 해보겠다고 나선 후보들이 즐비함에도 대선전은 시들하다. 생동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경선무대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하나같이 시큰둥하다. 대통령 탄핵의 여파로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 형식이 돼버린 선거구도가 흥미를 앗아가 버린 원인이다. 이렇게 진보진영의 집안잔치 일색으로 치러지면서 보수·중도 진영의 존재감이 사라진 선거는 정말 괜찮은 것일까.

각 정당의 후보가 결정되고 난 뒤가 더 문제다. 대선주자들이 어떤 셈법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라진다. 더불어민주당의 정당지지도가 과반을 넘나드는 상황 속에서 다른 정당들과 후보들이 떨어지더라도 개별적인 정치야망을 위해 지명도라도 높이겠다는 심산으로 줄줄이 뻗대는 모습을 보인다면 문제는 심각해질 수 있다. 작금 보수·중도 진영의 지리멸렬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선거제도가 갖는 가장 중요한 장점은 `긴장감`이다. 팽팽히 맞서는 선거를 통해서 `견제와 감시`라는 건강한 정서가 형성되고, 당선자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폭로·공작정치의 유혹이 난무하는 선거판에서 결과를 포기하고 이름이나 알리겠다고 우후죽순 나선 선거는 위태로움을 불러오기 십상이다. 일방적인 선거는 상상을 초월한 국가적 재앙으로 귀결될 수 있다. 19대 대통령선거가 이렇게 시시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 독일국민 95.7%의 88.1% 지지가 히틀러를 끝내 괴물총통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