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재현 편집국장
▲ 임재현 편집국장

가난한 연극인 선배로 부터 며칠전 책 두 권을 선물 받았다. 건강까지 안 좋아져 정부의 지원금 40여 만원에 생계를 기댄 그 형은 문화예술인의 마지막 품위는 잃지 않으려는 양 매월 적지 않은 금액을 헐어 양서를 구입해왔다. 먼저 읽은 뒤 내게 전해준 그 책은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이미경)과 `민란의 시대-조선의 마지막 100년`(이이화).

앞의 책은 한 화가가 20년 동안 전국에서 찾아낸 구멍가게들을 펜그림과 글로 기록해 놓은 내용이다. 그가 어떻게 찾아냈던지 2008년 옛 포항역 철길 근처 신흥동에 있던 청송수퍼를 기록해놓은 책장에서는 오랜만에 추억에 잠겼다. 재야 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책은 망국의 길을 걷던 후기 조선 전역에 이어진 민란들을 모아놓았다. 탄핵 촛불의 대열을 민란과 오버랩시킨 출간 의도가 드러났다.

그런데 모두 지난 1월 펴낸 이 책 저자들의 글은 탄핵 정국을 언급해놓은 공통점이 있다. 앞의 책은 `책의 출간을 앞둔 지금, 온 나라가 허탈감에 빠져 있다. 이 책이 묵묵히 삶을 이어가며 한자리를 지켜왔던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로 마쳤다. 이이화 선생은 역시 비장하다. `지금 전국의 거리에서는 민주 운동을 왜곡하고 민주 질서를 파괴하는 정권에 맞서 촛불시민혁명이 세차게 전개되고 있다. 시대 상황은 다르지만 19세기 민중운동사는 분명히 오늘의 거울이 될 것이다.`

민란을 생각해보았다. `촛불`이 민란이라면 `태극기`는 뭘까? 순조임금 이후 세도정치와 삼정 문란의 폭정에 이어 외세의 침략에 맞선 백성들의 저항이 민란인 바 모든 촛불은 민란인가? 젖먹이에게조차 세금을 물리는 가렴주구에 절망한 나머지 자신의 생식(生殖)을 탓해 `절양(絶陽)`하며 울부짖는 조선 백성의 처지와 절박함이 지금 이땅의 광장에도 관통하는가? 물론 자본제와 자유민주제를 채택한 시민사회에서 정치적 자유도 물적 풍요만큼 소중한 가치가 된 점은 전제로 한다.

광장에 나선 시민들의 열망이 더 나은 사회와 정치 발전으로 이어지게 하려면 그 뜻과 절실함은 민란의 그것과 다름 없어야 한다. 하지만 광장을 대선 유세장으로 전락시키는 대권 주자들의 욕심은 여전히 촛불의 민란적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중화의 사드 폭거 앞에서도 대선 승리를 위해서라면 민족적 굴종을 맞바꿀 수 있다는 정치인들의 무한 욕심은 그가 어느 상단(商團)의 행수(行首)쯤이 아닌지 착각하게 할 정도이다.

`태극기`도 마찬가지다. 헌법재판소와 특검이 대통령에게 헌법 폭력을 하고 있다는 식의 주장에 대해서는 초법적 권력자에 대해 너무 관대한 감성적 잣대를 댄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미 지난해 총선 공천과정에서 여당은 물론 한국 정치 전반의 수준을 깔아뭉갠 친박 정치인들에게 단상을 허락한 순간 태극기 진영도 보수의 가치라는 절제와 도덕성을 훼절시켰다.

광장은 일상이 아니다. 일상은 가정과 일터에 있다. 촛불과 태극기도 노동의 가치 앞에서는 일탈이요 임시의 몸짓에 불과하다. 거창한 혁명도 결국 궁극적 목적은 인간관계의 회복에 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일상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몸서리치며 깨달았다.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자식의 빈 의자를 보며 온 가족이 저녁식탁에 다시 모여 같이 밥 먹을 수 있는 일상이 바로 삶과 행복의 진리임에 먹먹해 졌다.

며칠 뒤 저 광장에는 지난 겨울 한때의 순수와 열정을 몰아냈던 갈등이 광포하게 들이닥칠 것이다. 저렇게 허리가 잘려 있는데도 또 나라가 조각날 걱정에 한국은 여전히 서정시 한 수 어울리지 않는 봄이다. 없는 반찬이지만 온 가족이 한그릇씩 뚝딱 해치우고는 직장으로, 학교로 달려갔다가 저녁이면 다시 모여 어머니의 된장찌개로도 하루의 피로를 풀던 시절이 있었다. 저 겨울 광장이 어서 풀려 대한민국의 집집마다 다시 쌀밥 한그릇 편안히 먹을 수 있는 봄이 오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