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중국 주나라의 유학에서 다루는 여섯 가지의 기초 교양과목. 예(禮)·악()·사(射)·어(御)·서(書)·수(數)를 육예라고 한다. 여기서 예는 예용(禮容), 악은 음악, 사는 궁술, 어는 마술, 서는 서예, 수는 수학을 말한다. 이것을 터득하기 위한 경전으로는 시·서·예·악·역·춘추의 육경(六經)이 있다. 공자는 일찍이 `활쏘기를 하는 것은 군자다운 점이 있다. 과녁에서 벗어나면 자기 자신에 돌이켜서 잘못을 구한다`라고 하면서 `사`에 대해 큰 비중을 두었다.

조호익(1545~1609) 선생은 그의 `지산집`에 공자의 말을 인용해 `활을 쏘는 데 대한 설(射說)`을 적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활쏘기를 하는 것은 군자다운 점이 있다. 과녁에서 벗어나면 자기 자신에 돌이켜서 잘못을 구한다. 제아무리 무지하기 그지없는 무인이나 사특하기 그지없는 소인이라 하더라도 화살을 쏠 적에 화살이 과녁을 빗나가면, 내가 잘못 쏘았구나, 하며 생각하고, 화살이 높이 날아가면 내가 지나치게 높게 쏘았다며 후회하고, 화살이 동쪽으로 날아가면 내가 한쪽으로 쏠리게 화살을 쏘았구나하며 반성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과녁이 지나치게 낮다느니 또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느니 탓하지 않고 잘못을 오직 자신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투호(投壺) 역시 그렇다. 고금의 일 가운데 오직 이 활쏘기와 투호 같은 놀이가 세태를 따라서 변하지 않았기에 성인이나 선비들은 그 정신을 담아 자신을 다스렸던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자신에게 돌이켜서 반성하는 행동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반성이 없는 삶은 또한 빈약하다.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잘못을 언제나 자신의 밖에서 찾으려는 행위를 곧 `어리석음`이라 일컫는다.

맹자는 `얻음이 없으면 모든 것에 대한 나 자신을 반성하라. 내가 올바르면 천하는 모두 나에게로 돌아온다. 남을 사랑하는데도 가까워지지 않거든 자신의 사랑을 돌이켜 보고, 남을 다스리는데도 다스려지지 않거든 자신의 지혜를 돌이켜 보고, 어떤 일을 행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한다`고 했다. 맹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현이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자세야말로 대인(大人)으로 완성되어 가는 길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지금의 우리사회는 모든 일의 발단을 `내 탓`이라는 책임의식보다는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회피풍조가 만연해 있다. 문화선진국의 정치미개국이란 오명을 안고 있는 정치 분야가 특히 그렇다. 여당과 야당은 서로 탓하며 이분법적 논리에서 상대만 나무라고 원망하는 폐습에 젖어 있다. 상대의 작은 잘못도 헐뜯으며 정작 자신의 큰 허물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용서한다. 소위 지도층에서 이러니 상사는 부하를 부하는 상사를, 제자는 스승을 스승은 제자를,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를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를 탓한다. 국민들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는 정치가 도리어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영향은 개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작용하여 모두가 자신은 돌아보지 않고 상대방만 탓하는 의식구조로 변절되어 있는 것이다. 초유의 국정농단사태의 모든 정황이 증거물로 드러나고 있는데도 모든 관련자들은 국회청문회나 헌재에서 하나같이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거나 자신이 불리하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또한 그들 변호인들의 앞뒤 안 맞는 어설픈 궤변은 초등학생들조차 머리를 갸우뚱하게 하는 부끄러운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은 `자기반성 없이 학식만을 쌓는 것은 가짜 학문이지 수양의 길이 아니다. 이는 장차 사회에 큰 해악이 되리라`고 경고하였다. 지금의 상황을 꿰뚫는 선비의 말씀이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의 `새 정치`니, `정치교체`니, `정권교체`니 하는 모호한 논리와 이합집산으로 떼 지어 이권을 찾아다니는 정치인들은 결국 또 이 사회의 혼란을 부추길 것이다. 거울 앞에 섰을 때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고 거울을 원망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