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29년, 얼추 30년 세월이다. 그때 나는 대학 4학년이었다. 학교는 그해 초겨울부터 황량했다. 1986년의 학생운동과 잇따른 검거로 인한 살풍경이었다. 1986년 학교에서는 자민투와 민민투 같은 운동체가 생겨 분신자살 같은 극한적 투쟁으로 나아갔고 당국은 그 표면 아래 있는 구학련 같은 조직 구성원들을 계속해서 검거했다. 운동권 학생들 상당수가 두 계열의 조직에 들어 있었으므로 선배와 같은 학년 학생들이 모두 잡혀가다시피 한 학교는 폐허가 된 것 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나는 그런 조직에 가담치 `못한` 괴로움을 안고 학교를 떠돌고 있었다.

1월 10일 조금 넘었을 때다. 신림동 289 종점 맞은편 골목 위쪽 다세대주택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나는 학교로 향하다 체육복 차림으로 길가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들고 올라오는 박종철 군을 만났다. 그는 나와 같은 학번이고 그 무렵 나는 국문과의 과대표를 맡고 있었기에 언어학과 과대표였던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학생회에서만 일하는 것 같지 않았고 어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그의 하숙집에 인문대학 학과 대표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거나 전단지를 나누어 받곤 했다.

1월 16일에 박종철 군이 당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 숨졌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그는 하숙집에서 대공분실로 연행된 지 30분만에, 책상을 탁, 하고 치자 억, 하고 죽어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온몸에는 수십 군데 멍자국이 나 있었다.

신문을 몇 개씩 훑어보면서 나는 그날 아침 아홉 시 반쯤이었나 만난 종철 군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날짜를 대충 셈해 보면 그는 그날 또는 그 다음날 연행되었다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는 나와 같은 학년의, 나이만 나보다 한 살 많은 친구였다.

당시 부검을 맡은 황적준 교수가 용기 있게 의혹을 말했고, 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그 엄혹한 시대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4월 13일에는 전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5월 18일에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박종철의 고문 치사 사실을 은폐하고 조작한 사실을 폭로했다. 당국에서는 시위에 나선 학생, 시민들을 가혹하게 다루고 연행해 갔지만 시국은 이미 뜨거워지고 있었다.

6월 10일이 되었다. 나의 양력 생일이 바로 6월 10일이었다. 일요일이었고 서울시청 앞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모인다고 했다. 나는 그날도 한 20분, 30분쯤 모였다 최루탄,`지랄탄`을 쏘는 전경들, 사복경찰들에 쫓겨 흩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벌써 몇 달째 그런 일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 흔한 풍경이 달라질 것 같은 예감 같은 것은 없었다.

그날은 달랐다. 시청 앞에서 신세계백화점 쪽까지 사람들의 물결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큰 길 옆에 서 있는 빌딩의 창문들에서는 크리넥스 티슈와 두루마리 화장지가 마치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빌딩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무직 직원들이 시위하는 학생들, 시민들을 향해 내려주는 것이었다. 거리에는 최루탄 연기와 냄새가 자욱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시위를 진압해야 할 전경들, 경찰버스들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사람들 천지였다. 사람들은 최루탄 총과 방패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전경들을 버스로 돌아가게 했다. 그로부터 20일에 걸쳐 시위가 계속되었다. 물론 그것은 이른바 6·29선언으로 변곡점에 다다랐지만 그 다음에는 노동자들이 7월, 8월에 걸쳐 권리 회복을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지난 11월 2일, 서울 시청, 광화문, 종로에는 1백만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없고, 명동성당의 김수환 추기경도 안 계시고, 조계사에서도 목탁 소리만 나고 있는 지금, 사람들은 마음의 구심점조차 없이 거리로 향했다. 모두들 신나 하는 것 같았지만 안쓰럽고 슬픈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