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래 수필가
인류의 역사는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지배하는 역사였다. 의식주를 위해 땀 흘려 수고하는 것은 언제나 약자의 몫이었지만 그 대가는 대부분 강자들의 차지였다. 이 땅위에 세워진 찬란한 인류 문명의 유산이란 것 치고 강자의 위세와 영화와 안락을 위해 약자들의 눈물과 피땀과 희생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그것이 인류가 구가해 마지않는 문명의 본질이고 인간 세상의 실상이다.

인간사회도 일견해서는 약육강식하는 동물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지만, 동물들은 생존에 적당한 양 이상은 결코 탐하는 법이 없는데 비해 인간의 욕망은 블랙홀처럼 밑도 끝도 없다는 점에서 천양지차다. 말하자면 탐욕이 있고 없음에 인간과 동물이 구분지어 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문명이란 결국 탐욕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문명이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데 생물학적 조건이나 지구 생태계는 유한하다는 것에 파국적 비극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그 파국적 징후들이 지금 도처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갈수록 심각성을 더해 가는 환경의 오염과 생태계의 파괴, 자원의 고갈이 그것이다. 각계의 뜻 있는 인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인류의 삶의 방식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귀담아 듣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걷잡을 수 없게 가속도를 더해 가는 문명을 추락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보다 높은 강도의 편익과 쾌락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온갖 재화(財貨)가 또다시 더 큰 욕구를 확대재생산하고, 그 악순환의 소용돌이가 자연의 질서에 대해 인류를 무정부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문명의 급류에, 무정부상태의 소용돌이에 함몰되고 휩쓸려가는 인간들에게는 추락에 대한 예감이나 속도에 대한 자각증상이 별로 없다는 것이 사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의 `동물의 세계`를 보고 있노라면, 인류가 오늘날 무엇을 향해 어떤 모습으로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인류가 편익과 쾌락과 변화의 속도감에 탐닉해 있는 동안 지구 생태계의 질서로부터 얼마나 멀리 이탈해 버렸는지, 그리고 그 일탈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자연은 극히 적은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자연이 그러하므로 나도 그렇게 하리라`

남의 집 다락방에서 렌즈를 갈아 호구하며 살다간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이다. 하지만 그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킨 오늘의 인간들로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도 오히려 죄스러워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인간의 덕목은 `겨우 살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겨우 살기란, 쉽고 편하게 살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간신히, 어렵게 살자는 것이다. 전력투구로 땀 흘리며 절실하게 산다는 것이고, 최한의 것으로 자족하며 산다는 것이며, 훼손하고 오염시킨 자연에 대해 부끄럽고 죄스럽게 산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무분별한 쾌락의 중독에서 치유되는 길이며, 탐욕의 노예에서 스스로 해방되는 길이며, 파괴된 생태계를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류가 진정한 생명의 자리를 찾는 일이고, 지속가능한 삶의 길이며, 동서고금의 성인현철들이 한결같이 모범을 보여준 안빈낙도에 이르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