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진숙동국대 교수·다르마칼리지
유년시절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외사촌 오빠의 결혼식을 앞두고 시골 이모님댁에서 돼지를 잡았다. 돼지 멱 따는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 후 잡은 돼지의 고기와 그 돼지의 내장으로 만든 순대를 맛있게 먹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 무슨 아이러니한 일인가? 돼지가 불쌍하다면서도 한 편으로 연신 맛있게 먹었던 입.

이제는 예전처럼 돼지를 집에서 잡는 일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지도, 죽일 수도 없다. 그러면 불법이다. 적어도 죽음에 있어서는 덜 고통스럽게 죽는다. 그런데 이제 돼지는 가엽게도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며 전생애를 대부분 살아간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집에서 기르는 돼지는 적어도 삶 자체가 불행하지 않았다. 돼지다운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나라 1인당 육류 소비가 지난 30년에 비해 4배 증가해 50여 kg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많은 고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대부분 국가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99%가 공장식 축산으로 그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수요에 맞게 고기를 많이, 빨리 공급하기 위해서는 농장식으로 그 고기의 양을 댈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와, 그 밖의 여러 경제적 이익을 생각할 때 공장식 축산이 돈을 벌기에 더 유리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기업형 축산 돼지가 살아가는 공간은 스톨(감금틀)이다. 스톨이 좁아지면 질수록 자본주의 시장은 점점 확장 팽창되며 소비와 인간의 욕구는 더욱 커지게 된다. 스톨은 곧 소비의 확장을 의미하는 동시에 동물들에게는 자유의 억압을 상징하며 동물기본권의 박탈을 의미한다. 이는 공장식 축사의 더럽고 비위생적인 환경과 스톨(감금틀)안에서 비참하게 돼지가 길러지기 때문이다. 비단 돼지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소를 비롯한 닭(공장식 닭장:배터리케이지) 등 다른 동물들의 사육 환경 역시 예외적이지 않다. 먹을 때만 머리를 위, 아래로 움직일 수 있을 뿐, 뒤로 돌일 수도 옆으로 몸을 돌릴 수 없는 옴짝 달싹 할 수 없는 비좁은 스톨 공간에서, 일정한 양과 정해진 시간에 나오는 먹이를 먹으며 살아간다. 평생을 고개 한 번 돌리지 못한다. 돼지들은 모두 기계화가 된 축사 안에서 그야말로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처럼 `생산`(공장 돼지) 되는 것이다.

동물기본권을 강하게 주장하는 피터싱어의 말처럼 `최소한 동물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몸을 돌린다든가 털을 고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일어섰다 누었다 하거나, 자신의 사지를 펼칠 수 있을 정도의 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동물의 기본적인 5가지 자유를 강조했다. 동물이 속박을 당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단호히 거부한 것이다.

현재 유럽연합은 농장동물의 5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돼지 스톨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의 공장식 축산에서는 스톨을 금지하는 조항은 없다. 인간도 기본권을 가지지 못할 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듯이 동물 역시 기본권을 갖지 못할 때 동물답게 살 수 없게 된다. 적어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면, 좁은 스톨에서 나와 살 수 있는 동물기본권은 보장해야 하지 않은가.

환경과 생태의 문제는 그동안 인간 삶의 고민을 폭넓게 확장시켰다. 이는 자본주의라는 산업구조를 비판하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인류가 먹거리에서 고기를 줄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게 한다. 필자는 채식주의가 아니다. 다만 동물기본권에 대한 학문적 인식의 차원을 넘어 이제 실천으로 가야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고기 먹는 회수를 조금씩 줄여나가고, 건강하게 길러진 가축을 먹는다면 적어도 동물들의 기본권은 차츰 보장될 것이다.

며칠 뒤면 제1회 `아시아 불교도 동물권에 대한 컨퍼런스`가 우리나라에서 열린다. 종교적 색채를 떠나 앞으로 어떤 실천이 더 필요한지 귀 기울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