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춘식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지난 6월 23일 국민투표를 통해 영국 국민들은 유럽연합(European Union)에서의 탈퇴를 결정했다. 각종 조사들은 잔류의 우세를 예견했으나 결국 `신사의 나라` 영국은 탈퇴를 선택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존 28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유럽연합이 단지 1개의 회원국을 상실한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명실상부 영국은 독일·프랑스와 함께 유럽연합을 리드하는 삼각체제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영국의 탈퇴는 정치적 통합체를 향해 지난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유럽연합의 존립에도 심각한 변수로 부상할 수 있다. 남은 회원국들이 `탈퇴 도미노 현상`의 조기차단에 민활한 대처를 하고 있는 것은 이 문제가 향후 `유럽의 평화와 유럽연합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분수령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의 근본적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표면적으로는 정치경제적인 문제들이 제시되고 있다. 또한 직접적인 요인으로 지난해 초부터 시작된 유럽난민 문제와 영국에 유입된 이민자들로부터 영국 노동자들의 고용공간을 방어하려는, 소위 영국민들의`경제적 민족주의`라고도 한다. 하지만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좀 더 장기적인 원인, 그 중 전통적으로 영국이 가진 유럽 대륙에 대한 역사적, 심리적 배경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프랑스와의 백년전쟁(1337-1453)이나 유럽의 경제적 지배를 목적으로 나폴레옹이 내린 대륙봉쇄령을 논외로 하더라도, 영국의 대륙정책의 중심 기조는 최소한 19세기 후반 이래 중부유럽에 형성된 독일이라는 강력한 정치적 통합체에 대한 견제에 있었다. 그리고 영국의 대륙견제의 실패는 20세기 전반기의 대참사인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여실히 증명되었다. 이로써 19세기 후반 이래 형성된 `섬나라` 영국 국민들의 반유럽(대륙) 정서에 20세기 전반기 독일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과 공포감은 중첩되었다.

이러한 영국민들의 정서는 독일과 프랑스 주도의 유럽경제공동체(EEC, 1958)와 이를 발전시킨 유럽연합(EU, 1993)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다. 그동안 다양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유로화의 도입을 회피했으며, 또한 표준화문제 등을 두고 대륙 내 유럽연합 회원국들과 사사건건 갈등관계였다. 특별히 주목할 역사적 사건이 있다. 유럽통합을 출구(Exit)로 분단을 극복하고, 초고속 경제성장을 구가하는 독일은 유럽의 경제권을 주도했다. 그리고 통일독일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가장 강력한 리더국가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독일 주도의 유럽연합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의 동유럽지역으로의 확대가 발단이 된 우크라이나 사태(2014)에 즈음해 영국의 지정학적 소외감은 극에 달했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영국의 탈퇴는 사실 정치경제적으로 독일 주도의 유럽연합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한편 역사적으로 영국과 독일은 게르만족(Germanen)이라는 공동의 기원을 갖고 있기에 양국의 관계는 친숙했었다. 앵글로-색슨(Anglo-Sexon)의 색슨(Saxon)은 독일의 작센(Sachsen)과 그 어원이 같으며, 두 국가의 언어인 영어와 독일어는 모두 서게르만어군에 속한다. 또한 1714년 영국의 앤 여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단절되자, 당시 독일의 연방국가 중 하나인 하노버 선제후(選帝侯) 게오르크 1세가 영국의 국왕 조지 1세로 추대되었다. 이후 1814년 하노버 선제후는 하노버왕가로 승격되면서 영국왕이 하노버왕을 겸하게 됨으로써 독일의 하노버 왕국과 영국은 직접적인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다. 나아가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는 영국 빅토리와 여왕의 외손주이다. 심지어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외손자인 빌헬름 2세의 17세 생일선물로 아프리카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러한 친숙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두 국가는 세계대전에서 격돌할 만큼 유럽의 헤게모니를 놓고 정치적으로 경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