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민호<br /><br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학교에서 서울대 입구역 쪽으로 방향 돌리면 산언덕 넘을 때까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다 가게들이 나타나는데, 그것도 다 그렇고 그런 가게들, 은행, 야구연습장 같은 것이다.

서울대 입구역 사거리 건너면 아직 촌티 못 벗은 동네. 내가 갈 곳이라곤 몇십년 된 신부산횟집, 그 옆에 막걸리 파는 만복국수집뿐.

그런데, 얼마 전에 변화가 생겼다. 모퉁이 인근 빌딩 2층 자리에 제법 큰 헌책방이 생긴 것이다.

가로수에 가려 있어 처음엔 무심코 지났는데 자꾸 지나치다 보니 서점임을 알겠다. 약속 시간 바쁜데도 그냥 못 지나치고 기어이 들어가 본다. `옛날` 버릇을 아직 못 고친 것이다.

10년전, 아니 5년 전만 해도 가끔 고정적으로 들르는 헌책방이 몇 곳 있었다. 옛날에 다 떨어진 딱지본 40여권을 물경 60만원에 사던 시간강사 시절, 그때는 돈 없을 망정 기개가 있었다. 넓지도 않은 헌책방을 이중 서가의 슬라이드를 앞뒤 다 훑어보며 책 호사를 하던 여유가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한 때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뻔히 지나치면서도 그렇고 그러려니 한다. 책 한 권 손안에 들이는 것도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 없다. 무엇 때문일까.

우선, 나이 탓일 것이다. 어렸을 때는 옛날 이야기책, 소설책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여자도 나이 들면 얘기책 보는 시간이 그렇게 아깝고 초조할 수 없는 이치 같다. 그러고서도 티비 드라마는 안 놓치려고 드는. 인생의 시간이 적게 남을수록 책이라는 `좁은` 세계에 시선을 뺏기는 게 두려워지는 것이다.

다음엔 돈이다. 취미도 비용이 너무 많이 들면 조심하게 된다. 아무리 재미 있는 일도 한번에 드는 돈이 크면 마냥 즐길 수 없는 까닭에.

그리고 자제하다 보면 자연히 흥미도 덜 당기게 된다. 관심이 적어지다 못해 아예 외면하게 될 수도 있다. 헌책 찾는 것도 그런 취미 활동의 하나라면 하나다.

헌 책이 그런대로 싸던 시절에는 그나마 `횡재`하는 재미도 있었다. 눈 먼 헌책장사님께는 죄송스럽지만 좋은 책, 값진 책을 싼 값에 사는 도둑 취미랄까. 하지만 지금은 없다. 인터넷 세상에 경매 세상, 어지간히 희귀한 책도 전부 온라인 상에 가격이 매겨지고, 사는 사람들끼리 경쟁을 붙여 고가를 만든다. 웬만한 좋은 책은 불렀다 하면 삼십만원이요, 그보다 더 나은 책은 아예 서점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다들 경매쪽에 몰리는 까닭이다.

헌책이 무서운 시절을 실감하며 지냈건만 오늘은 어쩌자고 또 헌책방을 찾아 올라갔더란 말인가.

들어가고 보니 책들이 참 가지런히 꽂혔다. 예전에 햇볕에 비바람 맞으며 창밖에 널려 있던 신세는 면했다. 종류대로, 크기별, 시대별로 제법 상당히 분류도 되어 있고, 좀더 가치가 있는 책은 안쪽에 따로 들어 눈 좋은 사람들을 기다린다.

또, 얼추 정가제 가깝도록 책 값도 붙어 있고 붙여 놓는 작업도 하고 있다. 컴퓨터로 갓 들어온 책들을 등록시키고 가격을 매겨놓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보자. 내가 훔친 여름이라. 김승옥 소설집 초판인데, 2만 5천원이다. 싸다. 그런데 이건 1960년대 것이 아니라 1980년에 다시 나온 것 같다. 박경리의 장편소설도 보이는데 8천원이다. 역시 싸다. 판권란을 보니 중판이다. 이문열 소설집도, 장편소설도 보인다. 구로아리랑이라면 그때는 흔하디흔했는데, 지금 보니 그래도 값지게 보인다. 더구나 초판이다. 또, 보자. 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도 있다. 이건 12만원을 붙였다. 아직, 이렇게 매길 때는 안된것도 같지만 판형도 특이하고, 책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의 수확은, 함북대관이라는 책이다. 함경북도에 관한 책인데, 청진도 나오고 결빙기의 웅기 항 사진도 나오고 주을 온천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이런 책이 많이 팔렸을 리 만무하니 당연히 초판. 1만 8천원이면 아주 잘 산 것 같다.

결국 나는 이런저런 헌 책들을 10만원어치나 사들고 나왔다. 안 먹어도 벌써 배부른 짜장면 같은 책들. 아뿔싸, 제 버릇 남 주기 참으로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