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자하문터널을 통과해 나가면 서울 풍경은 완연히 산에 가까워진다.

그렇잖아도 사방에 둘러친 땅에 도읍을 정했던 서울이다. 남산, 낙산, 인왕산, 백악산 등 경복궁에 자리잡은 조선 왕의 터전은 남동서북산을 거느리고 평온하고도 평정한 마음세계를 표상하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성큼 더 산에 가까워진 것 같은 자하문 바깥. 경복궁 서쪽 서촌에서 시작된 옛 서울 자취가 더 은근히 지속되고 있는 것 같은 홍지동 이광수 산장을 찾아가는 길이다.

이 산장의 옛날은 서울 바깥 홍지리, 나중에 일본식 홍지정이 되었다가 해방 후에 비로소 홍지동이 되었다. 옛날에 이광수가 조선일보 촉탁 부사장이던 무렵, 이곳은 풍광 좋은 별장터였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경치 찾아 별장을 지었으되 법화경 대승 불교 행자됨을 표방하고 도닦는 나날을 보냈다.

상명대학교 올라가는 언덕길에서 오른쪽 샛길로 살짝 빠져 좁고 가파른 언덕길 이십여 미터 올라가면 왼쪽 어느 대문 옆에 산장터 표지판이 나오고 높으막한 담장 위로 향나무, 이광수 시대에도 있었다는 나무가 보인다.

나는 여기 잠시 서서 명성과 오욕이 교차하는 삶을 바람처럼 살다간 한 사내를 추억했다. 1892년생, 6·25전쟁 나던 해에 세상을 떠났으니 환갑을 만나지 못한 짧은 생이었다. 그는 결혼을 두 번 했고, 일본에 유학도 두 번을 했고, 2·8 유학생 독립선언을 기초하고 상하이로 나아갔지만 곧 돌아와 `현실`속에 머무르면서도 그렇지 않은 삶을 동경하는 포즈를 버리려 하지 않았다.

1933년에서 1934년으로 넘어가는 때는 이광수에게는 마음의 시련이 컸던 해였다. 이 무렵에 이광수는 오래 몸담고 있던 동아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기면서 세간의 비난을 다시 한 번 샀고 사랑하는 아들 봉근의 죽음을 겪었으며, 모윤숙과의`사랑`문제로 밖으로 드러내지 못할 번민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불과 몇 달 만에 조선일보 부사장 직을 사임하고 금강산으로 갔다 돌아와 1934년 8월 무렵 홍지동 산기슭에 산장을 짓고 행자 생활을 만들어 나갔다.

이 홍지동 산장 시대는 그가 장편소설`사랑`을 끝내고 별장을 판 이야기를 쓴`육장기`(`문장`, 1939년 9월)가 발표되는 해까지 계속되었다. 그 1939년 5월 그의 산장은 육천 원에 팔리었고 그는 효자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5년 시간 동안에 이광수의 문학적 산물은 뜻밖에 부진해 보인다. 산장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그는 가장 아름다운 소설 중 하나인`유정`을 썼다. 그러나 `그 여자의 일생`, `이차돈의 사`, `애욕의 피안`, `그의 자서전`등으로 이어진 작품들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해 보이고 문학성의 정체를 맛보게 하는 듯하다. 그러다 마침내`사랑`상하편이 나온다. 그게 1938년 8월과 1939년 상반기다. 나는`유정`과 더불어`사랑`을 이광수 문학의 최고봉으로 본다.

이광수의 홍지동 산장을 뒤로 하고 내려온 길에 나는 문득 이곳이 연산군의 사연이 얽혀 있는 탕춘대가 있던 부근임을 깨닫는다. 지금 탕춘대는 사라지고 사적 표지문만 남아 있고 홍지문을 새로 만든 자리에 탕춘대성의 성곽만 일부 남아 있다.

홍지문은 숙종 때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해 지었다는 문으로 왕이 친히 편액을 하사했다고 한다. 탕춘대는 1506년에 연산군이 좋은 풍광을 즐기기 위해 지었다는 누대로, 한자 그대로 봄을 탕진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여기서 탕(蕩)은 쓸어버리는 것이고 흐르게 하는 것이다.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난 것이 바로 그 1506년이다. 현재 신영동 136번지, 그곳에 연산군은 냇가에 수각(물에 지은 정자)을 짓고 미희들을 희롱하며 놀았다.

지금 봄이 얼추 끝나가고 있다. 연산군도, 이광수도 모두 인생을 다사다난하게 보냈지만 결국은 일장춘몽처럼 내주고 스러졌다. 이광수 산장을, 홍지문을 뒤로 하고 나는 연산군의 탕춘대가 탕춘대성 이어진 어디쯤에 있는가 가늠해 보며 또 한 번의 봄이 끝나가고 있음을 의식하며 서울 풍진 속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