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br /><br />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빛과 소금이 되어라! 어릴 적부터 자주 들은 말이다. 필자는 어떤 특정종교 신자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의미를 되새길 따름이다. 어둠에 광명을 안겨주는 빛과 인체에 필수적인 소금이 된다는 것에 담긴 함의! 빛과 소금이 사라진 세계를 떠올리면 간명하다. 항상 어둠만 지배하는 세상과 싱거움으로 가득한 식탁은 어떤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계와 소금이 부재하는 음식을 연상함은 괴로운 일이다.

빛과 소금은 그야말로 최상의 쓸모를 대변한다. 공기와 물도 절대적으로 유용하지만, 우리는 빛과 소금의 쓸모에 더 익숙하다. 그래서 사람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들으면서 성장한다. 세상 어느 곳에서든 혹은 어떤 사람에게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명령이다. 그러므로 `쓸모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하는 부모나 교사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 상황일 터이고. 그런데 과연 그러해야 하는가?!

`장자`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대목으로 명성이 높은 장석이 제자를 데리고 쓸모 있는 나무를 찾으러 길을 나선다. 제(齊)나라로 향하던 장석은 곡원 지방에 이르러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정도로 큰 사당나무를 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아무 미련 없이 길을 재촉한다. 보다 못한 제자가 길을 막는다. 이렇게 좋은 재목(材木)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장석은 단호하게 제자를 나무란다. 이 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라고!

“이 나무로 배를 만들면 금방 가라앉고, 널로 쓰면 곧 썩을 걸세. 그릇을 만들면 쉽게 부서지고, 문으로 쓰면 진액이 흐르고, 기둥으로 쓰려 해도 좀이 생기네. 결국 이 나무는 아무데도 쓸모가 없어서 이렇게 장수를 누린 것이야!” (`장자`, `내편` 가운데 `인간세`)

만일 장석이 본 사당나무가 쓸모가 있었다면 그것은 훨씬 오래 전에 베어져 제 수명을 다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사당나무는 쓸모없음을 견지해왔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천수를 다하고 있었던 셈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장자` `외편`의 `산목(山木)`에서 우리는 정반대 상황과 대면한다. 장석이 제자를 데리고 옛 친구를 찾아간다. 장석을 반갑게 맞이한 친구는 하인을 불러 거위를 잡도록 한다. 하인은 잘 우는 거위와 못 우는 거위 가운데 어느 것을 잡을지 묻는다. 거위는 본디 집을 지키는 구실도 해야 했으므로 주인은 못 우는 거위를 잡으라고 명을 내린다. 여기서 장석의 제자는 혼란에 휩싸여 장석에게 묻는다.

“사당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천수를 누렸는데, 이제는 울지 못하는 거위가 죽음을 당했으니 저는 장차 어찌 해야 합니까?!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누리기도 하고, 또 죽임을 당하기도 하니 대체 무엇이 올바른 방법입니까?”

장자의 대답은 의외로 간명하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경계에 자리하는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중용의 경지`라고나 할까, 그런 경계를 장자는 말한다. 그런데 21세기 한국사회의 어느 부모가 장자의 이런 경지를 자식들에게 설파하고 있는가?!

일컬어 `실용주의`라고 할 것인가?!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경지인지도 모른다. 도저한 깨달음의 경지이거나 시끌벅적한 저잣거리를 초월하는 범상한 기인의 경지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있다. 언제나 쓸모 있다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능하고 똑똑하고 잘난 사람은 일찍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만큼 일찍 세상과 작별하는 법이다.

“일찍 핀 꽃은 일찍 시들기 마련이다!” 천재와 미인이 박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너무 일찍 만개하면 범용한 세상의 미움과 질시가 하늘을 찌르는 법이다. 양생(養生)의 토대는 어중간함에 있을지도 모른다. 군영(群英)들의 화사함이 앞을 다투는 시절의 오래된 상념이 문득 머리를 쳐드는 시간이다. 천재는 경배하여 먼저 길을 내주면 그만이다! 사태의 진상이 그럴진대 왜 우리는 천재를 박대(薄待)하는가?! 비루(鄙陋)한 인간들의 허랑 방탕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