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영재<br /><br />포항예총 회장
▲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

온 나라가 제20대 총선의 열기로 요란하다. 투표일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사실을 정확히 말하면 열기가 예전만 못하여 오히려 시들하다는 느낌까지 드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 더 이상 현실정치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기대 또한 별로 없기 때문이 아닐까.

현실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결국 일반국민들의 바람과는 동떨어진 왜곡된 결과를 초래하여 엉뚱한 자들에게 정치권력을 쥐어주고 마는 불행을 낳게 된다. 선거를 통하여 당선이란 절차를 거치고 나면 금방 초심을 잊고 갑의 위치로 돌아가는 부류들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정치는 필연적으로 적과 아군으로 편이 나누어지게 마련이며 피아간의 치열한 전투를 통하여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의 예술이다.

그 과정이 선의의 경쟁이면 예술이라 하여 손색이 없겠으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우리 편의 단점은 가려서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상대편은 헐뜯고 폄하해야 비로소 승리의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으니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할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유권자들의 표심 또한 워낙 변화무쌍하여 정치를 생물이라고도 한다. 정치의 근본이 인간의 안녕과 행복의 추구라면 인간의 행복이 과연 그렇게 변화무쌍한 과정에서 드라마틱하게 얻어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행복과 평화는 예측이 가능한 여정을 한걸음씩 나아갔을 때 조금씩 쌓여가는 것이며 그래야 가치 있고 지속가능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예술문화 분야에 종사하는 필자가 정치에 대하여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까닭은 선거철을 맞아 각종 언론매체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른바 공약이라는 이름의 과대포장과 이기를 추구하는 각종 집단의 패거리문화가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패거리는 서로 어울려 다니는 사람의 무리를 뜻하는 `패`를 얕잡아 이르는 것이니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패거리문화`라는 말 또한 어감이 편치 않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자의 사람인(人)자가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여 기대고 있는 형상을 본떠서 만든 상형자로 인간이 본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뜻하듯이 인간은 근본적으로 패거리를 지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패거리가 생기고 파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 패거리가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며 원래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패가 훨씬 더 많다. 패가 패거리로 전락하고 마는 이유는 집단의 이기심 때문이며 이것이 오래 지속되면 스스로 잘못임을 알면서도 정당화되고 결국은 스스로 도취되어 판단력까지 상실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져 사회갈등의 원인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패거리 내에서는 획일적인 사고가 강요되고 합리적인 토론보다 상명하복의 관계가 형성되어 개인의 다양성과 창조성이 말살되므로 패거리문화는 결국 미래 창조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 국가이므로 `우리`라는 집단의식이 유난히 강조되는 문화가 삶의 저변에 형성되어 있다. 서양의 `나`라는 개인주의 정신을 가벼운 처신이라 여기고, `우리`라는 집단정신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데 `우리나라`,`우리 집` 등의 경우는 물론이요 심지어`우리 마누라`처럼 어법상으로 대단히 이상한 경우도 있다.

정치를 예술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예술을 정치에 비유하는 것은 난센스다. 개인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본분이며 현실정치와는 일정거리를 두는 것이 예술가들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그러나 예술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치하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 또한 사실이다. 예술가들이 사심 없이 단합하여 한 목소리를 내고 창작에 전념하는 본분에 충실할 때 정치인들 스스로가 예술가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될 것이다. 진정은 서로 통하게 마련이며 문화, 예술에 무관심한 사람은 결코 창조적 미래의 지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와 예술, 예술과 정치가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는 예술공동체문화를 꽃피우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이다.

2016년 4월은 예술가들이나 정치가들 모두의 대오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