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일은 양면적(兩面的)이다. 재미나기도 하지만 귀찮기 때문이다. 꼬깃꼬깃한 신문지 위에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을 쌓은 다음 불을 붙인다. 어느 정도 불쏘시개가 자리 잡으면 작은 장작을 하나둘씩 올리며 불길을 살핀다. 그와 아울러 아궁이 입구에서 만든 불을 조금씩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굵은 장작도 몇 개 올려가며 보기 좋게 불 자리를 정리한다. 이런 식으로 20~30분을 보내다보면 어느새 아궁이에 열기가 들어찬다. 간간이 고개 들어 하늘을 볼라치면 굴뚝에서 잿빛이나 회색 연기가 굼틀댄다. 바람 드센 날이면 연기가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지만, 바람 잔잔한 날 연기는 모양새가 적잖게 다채롭다. 수령(樹齡)이 백 년도 넘은, 속 빈 감나무를 근경(近景)으로 흩날리는 연기는 향수(鄕愁)를 자극한다.

1980년대 아파트가 대대적으로 보급되면서 구들방과 아궁이가 신속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요즘에는 시골에서도 구들 놓는 장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 온갖 고초(苦楚)를 겪는데 이골이 난 한국인들은 어느 민족보다 집단성이 강하다. 유교문화의 영향이라고 하지만 남들의 시선을 유난히 의식하고 살아간다. 그래서인지 남들과 비슷하게 살아가려는 의지가 강하다. 결과적으로 고만고만하고 튀지 않게 살려는 무의식이 지배적이다.

농촌에서도 구들방과 구들문화는 기름보일러와 전기장판에게 밀려났다. 노인들조차 저렴한 전기판넬에 의지하며 `아이 따뜻해!`를 연발(連發)하는 세상이다. 하기야 고희팔순 넘은 노인네들이 한겨울 설한풍(雪寒風) 속에서 불을 때는 모습은 안쓰럽다. 홀로 늘그막을 견뎌야 하는 독거노인임에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보일러연기 대신 굴뚝연기가 기운차게 오르는 집을 보노라면 가슴 한 구석이 따스해진다. 농촌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된다.

작년 같으면 몇 번이나 뒷산에 올라 썩고 부러진 삭정이를 주워오느라 분주했을 터. 하지만 올해는 옆집에서 얻은 경운기 두 대 분량의 나무와 앞집에서 가져온 감나무 자른 것으로 구들과 벽난로를 지피고 있다. 그렇게 나의 겨울 3분의 2가 지나가는 시점이다.

산업화시대를 경과하면서 숱한 한국인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은 주범은 연탄이었다. 정부는 `산림녹화`를 위해 입산(入山)과 벌채(伐採)를 강력하게 금지했다. 나무 대신 보급한 연탄을 얻으려고 세숫대야나 고무 통을 들고 길게 줄을 섰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자주는 아니지만 오밤중에 어머니 대신 연탄불 갈러 일어난 기억도 있다. 어떤 때는 연탄이 위아래로 들러붙어서 부엌칼로 떼어내기도 했던 기억이 삼삼하다. 따뜻한 물을 얻기 어려워 찬물로 머리 감고 수건 찾을 동안 머리카락에 고드름이 맺혔던 스물 몇 살의 겨울날을 추억하는 것은 사뭇 유쾌한 일이다. 한겨울에도 반소매 반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풍경이 낯설지 않은 21세기 대한민국 아파트 거실! 그렇게 30년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최근에 나온 미래서적들은 우리 어린것들이 감당할 삶의 본질적인 변화를 지적한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직장을 찾을 때가 오면 현존하는 직업의 65%가 사라질 것이라 한다. 늦어도 2030년에는 무인자동차가 상용화(常用化)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사물 인터넷으로 연결된 정말로 `스마트한` 세상이 불과 10~20년 안에 펼쳐질 모양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20세기 교육방식과 대학입시를 고집한다. `프라임`과 `코어`로 대표되는 대학구조조정 역시 20세기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과 여기`에 함몰된, 전문가연하는 교육 관료들의 단견(短見)은 조만간 또 다른 구조조정을 야기할 것이다. 하기야 미래는커녕 현재와 과거도 제어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형국이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치열하게 현재를 살되, 과거를 의식하면서 미래를 기획하는 슬기로운 지식인과 양심적인 관료, 정치가들의 등장이 새삼 절실한 시점이다.